‘유서 대필’ 강기훈 23년만에 무죄 확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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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수 필적 감정 믿기 어려워”… 대법, 재심서 “무죄 원심판단 정당”
암투병 강씨, 법정에 안나와

1991년 분신자살한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한 혐의(자살방조)로 이듬해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51·사진)가 22년 9개월 만에 다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 누명을 완전히 벗게 됐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14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 상고심에서 “(유죄의 유일한 직접 증거인) 유서 필적을 감정한 김형영 전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의 감정서를 믿기 어렵고, 검찰의 나머지 증거만으로는 자살방조 혐의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며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 씨는 1991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동료 김 씨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유서를 대신 써주며 자살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강 씨는 1년 2개월 동안 법정에서 검찰과 치열한 ‘유서 대필’ 공방을 벌였지만 1, 2심과 대법원 모두 “유서에 나온 글씨체가 강 씨의 필적과 같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를 인정해 유죄를 선고했다. 유서 대필만으로도 자살방조죄가 성립된다는 최초의 판례였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김 씨의 필적이 담긴 노트와 낙서장을 입수하면서 사건은 새 국면을 맞았다. 위원회의 의뢰로 재감정에 나선 국과수가 “새로 발견된 노트와 낙서장의 필체가 유서와 비슷하고 강 씨 필체와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강 씨는 이를 근거로 2008년 재심을 청구했다.

검찰은 재심에서 국과수에 재차 필적 감정을 의뢰했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강 씨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 중 ‘ㅎ’과 ‘ㅆ’의 필법이 다른 점에 주목했다. 유서의 ‘ㅆ’은 제2획이 없는 독특한 글씨체였지만 강 씨의 글씨는 그런 특징이 없었다. 결국 서울고법은 지난해 2월 1991년 감정을 맡은 김형영 전 국과수 실장 진술의 오류와 허위를 지적하며 감정 결과의 신빙성을 배척해 무죄를 선고했다. 김 전 실장은 이 사건과 별개로 돈을 받고 문서를 허위 감정해온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기도 했다.

간암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진 강 씨는 이날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강 씨의 변호를 맡은 송상교 변호사는 “사건을 조작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작업을 강 씨와 상의한 뒤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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