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만족을 찾는다… “일보다 가족이 소중” 76%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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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新중산층 기준]SNS 3397명의 선택은

대기업 계열 금융회사에 다니는 이모 씨(32)는 얼마 전 185만 원짜리 자전거를 샀다. 주말에도 종종 출근하는 바쁜 직장생활이지만 그는 시간 날 때마다 한강변에서 자전거 타는 것을 즐긴다. 어린이날에는 팔당댐까지 다녀왔다. 이 씨는 “1000만 원 넘는 진짜 고가 자전거에 비하면 싼 자전거”라면서도 “나 자신을 위해 조금씩이라도 투자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이 씨에게 ‘신(新)중산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고급 디저트 열풍이 생각난다”는 답이 돌아왔다. 손꼽히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어도 중산층의 전통적인 기준인 ‘30평 아파트와 2000cc 자가용’을 장만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 시대. 새로운 중산층은 디저트 같은 작은 것에서라도 만족감을 찾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자신이 185만 원짜리 자전거를 산 것처럼 말이다.

묵묵히 참고 일만 하던 가장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그 대신 가족과 충분히 여가를 즐기고 자기 계발의 끈도 놓지 않는 신중산층이 주목받고 있다. 시민들이 한강시민공원에서 캠핑과 자전거 타기를 즐기고 있다. 동아일보DB
묵묵히 참고 일만 하던 가장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그 대신 가족과 충분히 여가를 즐기고 자기 계발의 끈도 놓지 않는 신중산층이 주목받고 있다. 시민들이 한강시민공원에서 캠핑과 자전거 타기를 즐기고 있다. 동아일보DB
○ ‘여·행·족’ ‘만추(滿追)시대’ 열린다

이 씨는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알아본 ‘신중산층에게 필요한 삶의 목표와 구체적 기준’에 상당히 가까운 사례다. 응답자 3397명의 선택은 연령,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뚜렷한 지향점을 보여줬다.

‘고생하더라도 성공하기’(37.3%)보다는 ‘소박하게 즐기며 살고 싶은’(62.7%) 것이 첫 번째 특징이었다. ‘일보다 가족이 소중하다’(76.2%)는 의견이 ‘일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고 싶다’(23.8%)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마지막으로 근소한 차이이기는 하지만 ‘사회’(46.5%)보다 ‘나의 행복’(53.5%)을 추구하며 살고 싶어 했다.

신종호 서울대 교수는 “최근의 해외 연구는 ‘성취’보다 ‘만족’을 추구할 때 개인의 행복감이 높아진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구성원 개개인이 각자의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볼 때 앞으로의 중산층은 ‘만추(滿追)세대’로 불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산층이 갖춰야 하는 기준으로 응답자들이 뽑아준 선택은 세 글자로 요약하면 ‘여(가)·행(복)·(만)족’이었다. 가족과 보내는 최소 여가시간은 1주일에 4시간(34.8%)이 가장 많았고, 8시간(24.0%), 12시간(16.7%)을 택한 응답자도 적지 않았다. 취미와 레저활동에 쓰는 시간으로는 주당 4시간(31.8%)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러나 이런 중산층의 삶을 누리는 데 드는 예상 비용은 높았다. 신중산층의 한 달 수입이 450만 원(33.3%) 또는 600만 원(34.3%)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 이상까지 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88.3%가 ‘최소 450만 원 이상’을 소득 기준으로 뽑았다.

○ 현실주의자가 된 X·Y세대

이번 SNS 조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한국 경제가 고속 성장하던 1980년대∼1990년대 초반 풍요로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X·Y세대의 움직임이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7’에서 묘사한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신인 가수 김원준과 신인 배우 이병헌을 내세웠던 1994년 화장품 광고 ‘트윈 엑스’는 X세대의 탄생을 알렸다. ‘남성 전용 화장품’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콘셉트였다. 종잡을 수 없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시대를 관통했다.

그러나 지금 30, 40대 초반이 된 이들 X·Y세대의 생각은 어떨까. ‘30평 이상 자가’를 마련해야 중산층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대답한 30대 비율은 53.7%로, 50대 이상(66.6%)보다 낮았다. ‘전세만 살아도 중산층’이라고 대답한 50대 이상은 5%에 불과했지만, 30대는 18.9%였다.

이런 현상을 놓고 일부에서는 “IMF세대의 학습효과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IMF세대란 1990∼1994년 대학에 들어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직후인 1998∼1999년 취업전선에 뛰어들면서 애를 먹은 세대를 뜻한다. 기라성 같던 기업들이 줄줄이 구조조정을 당하고 수많은 직장인이 순식간에 실직하는 것을 목도했다. 지금은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비정규직’이란 말은 2008년 개정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신조어로 처음 등록됐을 정도다.

○ 사회공헌에는 2030보다 중장년이 더 관심

사회가 발달하면 기부나 봉사, 지적 탐구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강해진다. 이번 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은 새로운 중산층의 기준으로 ‘기부금액 월 5만 원’(26%)과 ‘봉사활동 주 2시간’(21.4%)을 가장 많이 선택했다.

그러나 연령별로 보면 2030세대가 중장년층에 비해 기부나 봉사활동에 인색한 것으로 나타났다. 20대 62.3%와 30대 51.6%는 봉사활동과 중산층 기준은 상관없다고 답했다. 기부에 대해서는 각각 38.3%, 32.7%였다. 반면 50대 이상의 53.7%는 “최소 주 2시간 이상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 논의는 아직 물질적 가치가 중심에 놓인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앞으로는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이 힘들기 때문에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산층 기준도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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