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무기항 요트 세계일주 첫 관문 통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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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 적도 무풍지대 탈출, 그때 마신 맥주맛이란…”

김승진 선장의 적도 통과 이틀 뒤인 지난달 29일 왜목항에서 열린 적도제. 김 선장이 크리스천임을 감안해 목사님을 모시고 기도를 올린 다음 떡과 막 걸리를 놓고 용왕님께 무사항해를 빌었다. 희망항해추진위원회 제공
김승진 선장의 적도 통과 이틀 뒤인 지난달 29일 왜목항에서 열린 적도제. 김 선장이 크리스천임을 감안해 목사님을 모시고 기도를 올린 다음 떡과 막 걸리를 놓고 용왕님께 무사항해를 빌었다. 희망항해추진위원회 제공
과거 범선(帆船)으로 큰 바다를 오가던 시절, 뱃사람들 사이에는 ‘적도제(赤道祭·Neptune‘s Revel)’라는 의식이 있었다. 무사히 적도의 무풍지대를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다. ‘적도 무풍지대(The equatorial calms)’란 남위 5도에서 북위 5도 사이에서 북동무역풍과 남동무역풍이 마주치면서 대기가 위로 상승해 바람이 불지 않는 지역을 말한다.

오직 바람에만 의존해 항해를 하던 시대에, 무풍(無風)은 곧 재난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두 달씩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다는 곧 지옥이 된다. 마치 희생양을 바치듯, 선원을 로프에 묶어 바다에 던지는 이벤트를 할 때도 있다.

적도제의 풍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물론 상징적이다.

10월 19일 김 선장이 무기항 세계일주를 출발할 때의 동아일보 보도. 동아일보DB
10월 19일 김 선장이 무기항 세계일주를 출발할 때의 동아일보 보도. 동아일보DB
하지만 10월 19일 ‘희망항해’의 깃발을 걸고 무기항, 무동력, 무원조 요트 세계일주에 나선 김승진 선장에겐 그냥 ‘상징’일 수만은 없었다.

김 선장의 ‘아라파니’호는 11월 27일 오후 8시 42분(현지 시간 오후 10시 42분) 첫 번째 관문인 적도를 통과했다. 경도 163도32분.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와 마셜 제도, 그리고 솔로몬 제도를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중간쯤 되는 곳이다.

“적도를 통과했다는 김 선장님의 흥분된 목소리…. 통과 당시 시속 30노트의 바람이 불었답니다. 축하해주세요. 어쩜 무풍지대를 그리 쉽게 통과하나요? ^^.”

충남 당진 왜목항에서 육상지원팀을 이끌고 있는 박주용 한국크루저요트협회 부회장은 인터넷 카페에 이런 글을 올리고 자축했다. 무풍지대라는 게 경우에 따라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박 부회장의 글에서는 흥분이 배어난다.

왜목항은 김 선장이 세계일주 도전의 출발지로 삼은 곳. 육상지원팀은 육상지원팀대로 토요일인 29일 오후 왜목항에서 적도제를 지냈다.

항해 46일째인 이달 3일과 54일째인 11일, 김 선장과 위성통신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피지 서쪽을 돌고 있었다. 그동안 항해거리는 대략 4500해리(海里·nautical mile) 정도. 8000km가 넘는다.

지난해 8월 태평양을 횡단할 때 적도 부근에서 찍은 김승진 선장의 선상 모습. 그는 이 사진을 좋아한다. 김승진 선장 제공
지난해 8월 태평양을 횡단할 때 적도 부근에서 찍은 김승진 선장의 선상 모습. 그는 이 사진을 좋아한다. 김승진 선장 제공
―그동안 컨디션은 어땠나요?

“출항하고 3, 4일간은 힘들었습니다. 아마 항해 준비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몸과 마음이 그냥 무너진 것 같습니다. 왜목항을 벗어나 처음 200, 300마일을 항해하는 동안 강풍이 몰아닥쳤는데 어떻게 배를 몰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틈만 나면 잠에 빠졌습니다. 사흘 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적도 무풍지대를 무사히 잘 벗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육상지원팀이 기상에 맞춰 항로 안내를 잘 해줘서 6시간인가 8시간 만에 무풍지대를 벗어났습니다. 그 시간 동안에는 그냥 수영도 하면서 바람이 불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적도를 통과하는 데 예상보다 며칠 지연됐습니다.”

―육상지원팀은 돼지머리도 준비해서 ‘적도제’를 지냈다고 하던데 김 선장은 어떻게 했습니까.

“적도 통과가 샴페인을 터뜨릴 정도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티셔츠에 반바지까지 차려입고 캔 맥주 하나를 땄습니다. (웃으며) 나름대로 격식을 차린 거죠. 사실 보통 때는 거의 옷을 안 입고 지내거든요. 또 제가 술을 안 해서 맥주도 6개짜리 한 팩만 가져왔습니다. 샴페인과 와인도 가져오긴 했지만….”

―다음 관문은 칠레 최남단의 혼 곶 앞바다인데 언제쯤 통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까.

“1월 말쯤으로 잡고 있습니다. 제 생일이 1월 23일이라 생일이 되기 전에 통과했으면 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땐 샴페인을 하나 따야죠(웃음).”

―그동안 고비도 많았을 텐데 언제 제일 힘들었어요?

“처음에 장비가 자주 고장 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냉장고에서부터 포스테이(forestay·돛을 배 앞머리에 잡아주는 밧줄) 부속품까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고장이 났습니다. ‘과연 이 상태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무역풍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부는데 저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바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흔히 순풍이라고 하는 뒤바람을 받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그재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북위 6도 부근은 태풍이 만들어지는 곳이라 크고 작은 돌풍이 굉장히 많이 발생합니다. 흔히 ‘태풍의 씨앗’이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만 해도 두 차례나 돌풍을 만났습니다. 그런 돌풍을 만나면 서너 시간씩 싸워야 합니다.”

―그럴 때면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없습니다. 물론 가끔 머∼엉 할 때는 있습니다. 배가 바람을 받아 주∼욱 나아가고 있는데, 바람이 좋으니 그게 당연한데도 어느 순간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하지만 도전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김 선장보다 나흘 뒤인 10월 23일 부산 수영만 요트계류장을 출발한 ‘스피릿 오브 코리아(Spirit of Korea)’호의 윤태근 선장은 항해 4일째 회항(回航)을 결정하고 돌아왔습니다. 윤 선장은 우울증 얘기를 하던데 김 선장은 전혀 그런 게 없었습니까?


“우울증까지는 몰라도 왜 그런 적이 없겠습니까. 3주차 정도 됐을 때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일주일 전에는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는 바람에 3일 내내 사방이 어두웠습니다. 마치 암흑 속을 헤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때는 갑자기 감정의 기복이 생깁니다.”

―해상도킹을 위해 피지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던데….

“아! 네, 육상지원팀에서 피지의 한국대사관에 긴급 요청을 한 모양입니다. 제가 피지 가까이 지나갈 때 배를 가지고 바다로 나와 항해사진도 좀 찍어주고 제가 그동안 촬영한 동영상 자료도 좀 받아달라고 말입니다. 섬 부근에 산호초가 있어 너무 가까이 갈 수는 없고 약 20해리쯤 다가가 사진 및 동영상 자료들을 바다에 던져줄 생각입니다.”

―참, 당진 부녀회가 만들어준 ‘그 남자의 식단’은 어떻던가요?

“사실 음식은 제가 직접 준비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뭐가 실렸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항해를 시작한 지 3, 4일쯤 뒤 정신을 차리고 음식을 찾아보니 양념이 없는 겁니다. 다시다도 없고…. 간장, 된장, 소금, 고추장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부녀회원들이 만들어준 건조식품의 진가를 알게 됐습니다. 양파, 호박, 감자 같은 야채는 물론이고 김치까지 말려서 싸줬는데 그날 입맛에 따라 재료를 적당히 조합해 냄비에 넣고 끓이면 바로 국밥이 되는 겁니다. 움직이는 배에서는 국밥만 한 게 없습니다. 또 비빔밥도 만들 수 있고…. 정말 환상적입니다. 음식재료를 찾을 때마다 보물찾기 하는 기분입니다. 고기도 처음엔 왜 이렇게 맛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충분히 물에 불리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물에 몇 시간 불려서 먹으니까 식감이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하루 두 끼씩 먹고 있습니다. 참, 라면도 100개쯤 실려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끓여 먹습니다.”

―왜목항에서 출항할 때 보니까 딸이 있던데 가끔 통화는 합니까? 지금 중학생이라고 했던가요?

“아니, 고등학생입니다. 전화는 가끔 합니다. 엊그제가 딸애 생일이라 전화를 했더니 ‘아빠, 꼭 성공하고 돌아와!’라고 하더군요. 예전엔 그냥 요트 타고 놀러 다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빠가 하는 일이 그냥 ‘요트 놀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입니다. 2010년 크로아티아에서 한국으로 올 때쯤엔 ‘아빠, 살아 돌아와!’라는 문자를 보내더군요.”

육상지원팀이 설계한 항로에 따르면, 두 번째 관문인 혼 곶까지는 약 7600해리. 육상지원팀은 유빙(流氷)의 위험을 감안해 피지 서쪽을 돌아 남위 50도로 칠레에 접근한 뒤 혼 곶으로 내려가는 항로를 제시했다.

육상지원팀장을 맡고 있는 박주용 부회장과 역시 자원봉사에 나선 손유태 씨가 하루 종일 매달리는 건 기상분석. 요트 입문(8년차)도 비슷하고, 연배도 비슷한 두 사람은 오전 7시 기상과 동시에 분석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미국 일본 등 5군데의 기상자료를 받아 각자 분석한 뒤 서로 맞춰봅니다. 한 사람의 의견만으로 항로를 결정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서로 토의를 합니다. 그런 작업을 아침에 한 번, 저녁에 또 한 번 하기 때문에 하루가 금방 갑니다. 특히 손유태 씨의 역할이 큰데, 김 선장과 통화를 해보면 우리가 분석한 기상상황과 현지 사정이 거의 들어맞습니다. 그럴 때는 마치 김 선장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재미가 솟습니다.”

박 부회장과의 전화 통화 끝에 윤태근 선장 얘기가 나왔다. 박 부회장은 말을 아꼈다.

윤태근 선장의 회항


윤 선장의 ‘회항’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윤 선장 스스로의 낙담이 얼마나 클지 알기 때문이다.

출항할 때부터 관절염을 걱정하던 윤 선장은 나흘째 되던 날 회항을 결정했다.

“고민 끝에 회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하네요. 몸도 마음도 견디기 힘든 상태에 빠졌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고 복합적인 판단인데 한마디로 잘 정리가 되지 않네요.”

그는 육상지원팀에 이런 말을 남기고 일본 가고시마 항으로 선수를 돌렸다. “안 가면 안 돼?”라고 걱정하던 아내까지 회항을 말렸다.

“여보, 지금 힘든 것도 지나고 나면 먼지에 불과해요. 배를 돌려요!”

하지만 윤 선장은 “육지에서 내린 판단보다 바다에서 내린 판단이 더 옳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머리를 흔들며 항구에 배를 접안했다”고 토로했다. 그의 말처럼 돌아오는 1마일, 1마일이 고통이었겠지만, 육지에서 내린 판단보다 바다에서 내린 판단이 더 옳을 것이다.

“(2011년) 20개월간의 단독 세계일주도 한 번 했고, 일본∼한국 간 항해횟수만 해도 150회가 넘는데 이 정도면 나도 베테랑 선장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한 나를 발견한 것이 이번 항해를 통해 얻은 교훈입니다. 내년 9월에 같은 배로 다시 도전하든지, 12월쯤 원래 마음에 두었던 배를 구매해 재도전하겠습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무기항 요트 세계일주#적도 무풍지대#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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