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국군, 북한군으로 편 나눠 ‘6·25 놀이’하는 초등생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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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왜곡된 인터넷 문화에 노출되는 초등생이 늘고 있다. 사진은 20일 경기의 한 학원에서 공부하던 한 초등생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모습.
최근 왜곡된 인터넷 문화에 노출되는 초등생이 늘고 있다. 사진은 20일 경기의 한 학원에서 공부하던 한 초등생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모습.

《“쏜다! 이 빨갱이 놈들! 반란 노무 ××!(노무는 놈의 인터넷 은어)”

경기지역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5학년 박모 군(11)은 최근 학교 점심시간에 학급 친구 10여 명과 ‘시민군’과 ‘계엄군’으로 편을 나눠 ‘5·18 놀이’를 했다. 초등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예능프로그램인 ‘런닝맨’을 본떠 만든 이 게임의 규칙은 이랬다. 무기가 없는 ‘시민군’은 ‘계엄군’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는 방식으로만 공격이 가능했다. ‘계엄군’에겐 무기가 주어졌다. 종이를 돌돌 말아 만든 종이막대에 콩알만 하게 종이를 뭉쳐 만든 ‘총알’을 넣은 뒤 입으로 불어서 ‘시민군’을 맞히는 것.

상대팀원 모두를 제거하는 팀이 이기는 규칙이었다. 학생들은 게임을 하는 동안 “독재자” “시대의 악덕” “종간나 ××들” 같은 말을 상대편에게 하면서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교내를 뛰어다녔다.박 군은 “이 게임에서 쓰는 표현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배웠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혼자 있을 때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면서 논다”면서 “친구들과 25일에는 국군과 북한군으로 편을 나눠 6·25 놀이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6·25 놀이’… ‘야플놀이’ 즐기는 초등생들


큰일이다. 최근 초등생 사이에서 왜곡된 정치적, 성(性)적인 내용을 주제로 한 놀이가 확산되고 있다. 적잖은 초등생이 학교에서 △5·18민주화운동, 6·25전쟁을 주제로 만든 ‘런닝맨 놀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며 “나는 자연인이다∼운지!”라고 외치는 ‘운지놀이’(‘운지’는 추락을 의미하는 인터넷 은어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비하하는 뜻을 가진 잘못된 표현) △자신들만의 암호를 만들어 학급 여학생을 성적으로 놀리는 ‘야플놀이’(‘야플’은 ‘야한 플레이’의 약자) 등을 거리낌 없이 즐긴다.

초등생들은 왜 이런 잘못된 놀이를 즐기는 걸까.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뒤 인터넷을 이용하는 시간이 증가한 초등생들이 극단적인 정치적 주장이 담긴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과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아이돌 가수에 관한 기사에 달린 성적인 내용의 댓글 등을 접하는 빈도가 급격히 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직장생활 등으로 바쁜 학부모 대부분은 초등생 자녀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공간에서 무엇을 보는지 알기 힘들다. 만약 알게 되더라도 자녀가 왜곡된 인터넷 문화에 노출되는 것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 자녀들이 왜곡된 생각을 갖지 않도록 일선 교사와 학부모들의 각별한 지도가 요구된다.

“똘똘하게 잘하게 생겼다”… 알고 보면 성적인 표현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6학년 교실. 짧은 치마바지를 입은 한 여학생이 교실 앞으로 나와 발표를 시작하려 하자 같은 반 남학생이 “이야∼. 똘똘하게 잘하게 생겼다. 멋져∼”라고 말했다. 학급 친구를 응원하는 말 같지만 사실 이 학생은 이른바 ‘야플놀이’를 한 것이다.

다른 남학생들이 깔깔대며 웃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이 학급의 교사는 학생들을 불러 면담을 했고 ‘똘똘하다’라는 표현은 ‘성관계’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부 남학생들이 야플놀이를 하기 위해 ‘똘똘하다’의 뜻을 자기들끼리 미리 정해놓은 것. 이들 학생은 다른 수업시간에는 ‘딱따구리’와 같은 또 다른 암호를 정해 가슴이 큰 여학생이 발표를 하면 새소리를 내거나 “딱따구리 예쁘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학급의 A 교사는 “성적인 내용을 ‘호롤루’ 같은 의성어나 의태어 등으로 쓰는 경우도 많아 알아채기 쉽지 않다. 학생들과 면담을 하면서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묻자 ‘재미있잖아요’라고 대답해 어이가 없었다”면서 “성적인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불감증이 더욱 심해졌다”고 걱정했다.

극단적 내용도 ‘재미’로 받아들여

문제의 발단은 인터넷. 인터넷에선 정치적·성적 내용을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 가치 판단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초등생들이 이를 그저 ‘재미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초등생들은 이런 게시글이나 댓글 등에 로그인이나 성인인증 과정 없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포털사이트 네이버를 통해 제공되는 기사들을 살펴보니 아이돌 가수와 스포츠 치어리더 등의 사진을 담은 기사에는 ‘내 다리를 봐∼육감적인 섹시미’ ‘끈 나시(민소매의 일본식 표현) 입고 아찔 몸매’ 등의 제목이 붙어 있다. 기사에는 성적인 내용을 담은 댓글이 수백 개씩 달려 있었다.

댓글에는 △허벅지 개꿀이다 △딱 달라붙는 숏팬츠… 너무 좋다 하앍 *-_-* △개쩐다. 이맛에 삽니다 등 마치 장난치듯 성적인 표현을 한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경기지역 초등학교 5학년 B 군은 “표현 자체가 웃기고 재미있으니까 카카오톡이나 문자할 때도 ‘하앍하앍’(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표현한 인터넷 은어) ‘엉덩이가 찰지구나’ 같은 표현을 많이 쓴다”면서 “‘운지’ 같은 말은 인터넷 유행어를 정리해놓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배웠다”고 전했다.

통제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 길러줘야

문제가 이처럼 심각하지만 학부모들이 자녀의 휴대전화라도 들여다보면 ‘사생활 침해’라는 아이의 반발에 부닥치기 십상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도 쉽지 않다.

요즘 초등생은 대부분 카카오톡 등 스마트폰 메신저에 만든 단체 채팅방에서 대화하며 관계를 맺고 있어 자칫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부 교사는 카카오톡을 통해 학생들에게 공지사항을 전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많은 교사와 교육전문가들은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지 말라고 막거나, 스마트폰 사용 자체를 통제하려고 하기보단 왜곡된 정보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지역 초등학교 C 교사는 “아이들은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를 ‘재미’로 생각하기 때문에 무조건 막으려고 하면 호기심을 더 키울 수 있다”면서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 등을 함께 보면서 ‘이런 말을 쓰면 어떤 느낌이 들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자녀가 스스로 문제점을 찾아내도록 지도하는 편이 좋다”고 조언했다.

글·사진 이태윤 기자 wolf@donga.com

공동취재: 정기승 대학생기자(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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