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사서 복사한 뒤 바로 환불… 슬픈 ‘대학 9학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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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사립대 학생 박모 씨(28)는 주말에도 학교를 찾는다. 인적이 뜸한 오전 그는 자취방에 쌓인 쓰레기를 검은 비닐 봉투에 꾹꾹 눌러 담아 학교 휴지통에 버린다. 쓰레기봉투 사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다. 2003년 입학해 군복무 기간을 빼고 ‘7학년’인 그의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자금을 보내주고 있다.

박 씨는 “좋은 직장을 구하려면 계속 스펙을 쌓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생활비 부담이 적지 않다”며 “최대한 아끼기 위해 학교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생수를 사는 것도 부담스러워 1.5L 페트병을 준비한 뒤 학교 정수기에서 물을 채워 귀가한다”고 말했다.

대학가에 ‘21세기형 눈물 젖은 빵’ 현상이 등장하고 있다. 취업난과 경기불황으로 10년 가까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대학 9학년 세대’라는 용어가 생겨난 요즘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이 학교 물품을 자취방으로 가져가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학생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돈 절약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한 잔에 3000원이 훌쩍 넘는 커피를 마시고, 아무 부담 없이 공부를 하는 학생도 많지만 힘들게 생활비를 아껴야 하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며 어려운 삶을 한탄했다.

최근 개강을 맞은 대학 구내서점에서는 새 학기 교재를 구입해 필요한 부분만 복사하거나 제본한 뒤 곧바로 환불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 학기에 보통 5, 6개 강의를 듣는 학생에게 권당 2만∼3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 전공서적은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구내 서점 송진근 점장은 “환불규모가 한 달에 2000만∼3000만 원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학교에 오래 다니는 취업 준비생은 영어 문제집이나 취업 관련 서적을 빨리 보고 환불하는 경우가 많다”며 “매출이 줄고 있지만 학생들 처지를 생각하면 딱히 뭐라고 할 수도 없어 난처하다”고 말했다. 다른 사립대 구내 서점 관계자 역시 “책을 사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스마트폰으로 찍어 간 뒤 이를 프린트하는 학생들도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수업을 함께 듣는 학생 6, 7명이 강의 관련 서적을 한 권만 산 뒤 이를 복사해 나누기도 한다. 생활비를 아끼려고 화장실에 비치된 손 세정제나 두루마리 화장지를 자취방으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싼값에 끼니를 해결하려는 대학생이 많다보니 싸고 간단한 식사대용 식품의 매출이 급증하고 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이 1∼10일 서울 시내 대학 구내 편의점 6곳의 매출을 분석한 결과 1000원대 햄버거 등 식사대용 식품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3% 늘었다.

이 같은 대학가의 슬픈 신풍속도는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든 데다 불황과 취업난으로 오랜 기간 학교를 다녀 빚이 늘어나는 학생이 많아지면서 생겨났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달 대학 졸업 예정자 2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응답자의 64.3%가 취업준비 등으로 ‘졸업을 연기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2월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대학 졸업예정자들은 평균 1308만 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2007년 같은 조사보다 708만 원 늘어난 수치다.

2004년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해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는 김모 씨(27)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휴학을 밥 먹듯이 했고, 그 기간에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며 “면학 장학금을 3번이나 받았지만 생활비와 학비 마련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라 2009년에는 2000만 원을 대출받아 아직도 빚이 1700만 원이나 된다”고 했다. 그는 “이제 졸업을 하려면 토익이나 한자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이 비용도 부담”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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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대#박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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