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세 최고령 독립투사 49년만에 ‘빨갱이’ 누명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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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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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비서실장 구익균 선생 ‘北 동조’ 재심서 무죄“감개무량… 安선생 만나 공산 아닌 구국의 길 배워”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동 적십자병원에서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이 49년 만에무죄 선고를 받은 소회를 밝히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동 적십자병원에서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이 49년 만에무죄 선고를 받은 소회를 밝히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감개무량합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고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국가가 되도록 노력하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24일 서울 종로구 평동 서울적십자병원 9층 병실에서 만난 현존 최고령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103)은 북한에 동조했다는 누명을 49년 만에 벗은 소감을 묻자 환하게 웃었다. 구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1961년 장면 정부가 추진한 반공법을 반대하고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다 유죄가 선고됐으나 재심을 통해 억울함을 풀었다.

○ 49년 만에 무죄 선고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판사 김용섭)는 구 선생 등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다 북한 활동에 동조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선고된 통일사회당 사건 관련자 5명에 대한 재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고 24일 밝혔다. 구 선생 외에 4명은 모두 숨진 상태다.

재판부는 “이들이 1961년 당시 민주당 정권이 추진 중이던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한 것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등 기본권의 범위에 포함되는 활동”이라며 “피고인들이 북한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제창한 것도 아니다. 북한에 이익이 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밝혔다.

1961년 3월 장면 정부가 반공태세를 강화하고 사회 난동을 방지한다며 이 법 제정을 추진하자 통일사회당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같은 해 5·16 쿠데타 이후 설치된 혁명검찰부는 통일사회당이 북한의 활동을 고무하거나 동조했다며 구 선생 등 간부 10여 명을 기소했다. 1962년 구 선생은 과거 독립운동을 한 점을 인정받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난 것이 전환점

1908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구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 192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여기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났다. 이후 도산을 빼놓고는 그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는 그때 도산 선생을 만나 공산주의만이 나라를 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평생 그의 초상화를 방안에 모셔두며 그의 뜻을 받들어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이날 구 선생은 도산 선생과의 일화도 꺼냈다. 그는 “내가 하루는 도산 선생에게 ‘애국가 가사를 직접 쓰신 게 맞느냐’라고 물어봤는데,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다가 재차 물어보니 ‘맞다’고 하셨다”며 “그는 민족의 분열에 비통해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3년간 도산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1930년에는 도산의 지침을 받들어 대독립당 결성에도 참여했다.

1935년 구 선생은 상하이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혀 신의주로 압송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항일운동을 하다 광복을 맞은 이후로는 무역업 등에 종사하면서 진보당 창당을 지원했다. 1960년 4·19혁명 후에는 정당활동에 투신해 통일사회당 재정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우리는 단식투쟁을 하면서 5·16쿠데타와 박정희를 반대했다”며 “현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이 옳고 그른 것을 잘 구별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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