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나의 NIE]김용희 평택대 교수·소설가

  • Array
  • 입력 2011년 9월 22일 03시 00분


코멘트

투박하지만 좍∼ 펼치는 ‘신문의 맛’
다양한 세상과 만남이자 역사의 기록

신문에서 50대를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남편은 호들갑을 떨었다. 소리 내 읽으면서 흥분했다. 50대의 위기를 느끼는 게 분명했다. “야, 야, 이리 와 봐. 이거 당신도 읽어봐.” 그는 위기감에 동지를 얻기를 원했다.

자신과 같은 50대를 언론이 대문짝만 하게 다룬 데 대해 남편은 ‘세상이 우리를 밀어내려 하는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근데, 왜 신문에서 50대를 크게 다룬 줄 알아?” 남편이 쳐다보자 나는 “신문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이 50대거든.”

하긴 신문을 어떤 세대가 읽겠는가. 20대가? 30대가? 40대에서도 후반 정도가 신문을 읽는 축에 들어가는 것 아닐까.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나는 신문에 나온 내 칼럼을 학생들이 읽었기를 바라면서, 정말이지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한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아쉽게도 단 한 명도 내 칼럼에 대해 말을 꺼내는 학생은 없다.

1인 1매체의 시대라고 한다. 누구든 글을 써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올린다. 누구든 작가가 되고 누구든 기자가 될 수 있다. 신문기자가 특종을 하면 뭐 하는가? 부장의 원고수정 작업을 거쳐 윤전기를 돌릴 때쯤이면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어, 김 기자, 이미 트위터에 떴어.”

현대인은 싸이월드에서 블로그로, 블로그에서 트위터로 발 빠르게 옮아갔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트위터에 올라가는 글은 일명 ‘낚시’를 목적으로 하는 가판대 위 물건일 뿐이다. 선정적인 제목과 편파적이고 파편적인 내용 때문에 독자는 정보를 편식하게 된다.

신문은 어떤가. 좀 투박하긴 하다. 하지만 눈앞에 좍∼ 펼치는 맛이 있다. 폭넓은 이슈와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세상과 골고루 만날 수 있다. 시끌벅적하면서도 의미 있는 세상과의 만남. 신문은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에겐 역사의 현장이고, 세월이 흐르면 역사의 기록이 된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헤밍웨이는 캔자스시티스타 신문사의 기자 출신이었다. 그의 문장의 출발은 기사 쓰기부터였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탄력적인 단문, 단검을 휙휙 던지듯 써내려간 문장 중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인간은 패하지만 멸망하지는 않는다.” 여백의 미와 여운을 남기는 헤밍웨이의 문장은 후배 작가들에게 베끼거나 넘어야 할 문장 쓰기의 고전이 됐다.

학생들은 내게 말한다. “에∼이 교수님, 요즘 누가 신문을 읽어요?” 나는 말한다. “세상의 마음을 읽는 데 신문만큼 맛있고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는 없다.” 삶과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수많은 다양한 문장을 만날 수 있는 곳. 신문을 읽고 세상을 보자. 이 시대의 문장을 만날 것이다. 그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만날 것이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