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도살처분 공무원-군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고통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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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대방출… All kill… 꿈에 소-돼지가…”
차병원, 47명 미술치료

올해 초까지 구제역에 걸린 소와 돼지 도살처분 작업에 21번 참여한 군인 K씨는 요즘 미술치료를 받고 있다.

군인 K씨가 미술치료 시간에 그린 그림 ‘온몸 깊숙한 곳에 있는 나의 분노’에는 빨간 머리, 빨간 눈, 빨간 입술을 가진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 사람 주변에는 ‘분노대방출’ ‘분노게이지’ ‘All kill’ 등의 글씨가 적혀 있다. 그는 도살처분 당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약물을 주사해도 죽지 않는 소나 돼지를 곡괭이 삽으로 때려서 매장하는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이 그림을 본 김선현 차병원 미술치료클리닉 교수는 “분노대방출이란 표현은 자신의 내면에 쌓여 있는 분노를 해소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보여준다”며 “군인 K씨는 처음 상담을 시작했을 때 아예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멍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군인 K씨는 상담을 받기 직전 가축 떼를 묻은 자리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안개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만 같아 숨이 턱턱 막혔다. 꿈에는 아무리 때려도 살아서 기어나오던 소나 돼지가 나타났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고 자다가 호흡장애가 오기도 했다. 돼지는 사람 피부색과 비슷한 살색이었다. 도살처분 횟수가 늘어날수록 돼지를 죽이는 것인지 사람을 죽이는 것인지 헷갈렸다. 군인 K씨는 병원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김 교수팀은 1월부터 경기 이천시 정신보건센터와 군부대에서 도살처분에 참여한 공무원과 군인 가운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의심되는 환자 47명에게 미술치료를 실시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뒤 나타난다. 보통 3개월 이내에 발병하지만 30년이 지나 나타난다는 보고서도 있다.

김 교수는 상담한 군인과 공무원의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했다고 말한다. 스트레스 검사를 실시한 결과 100점 만점에 고위험군에 속하는 40점 이상이 대부분이었다. 고위험군 환자는 과도한 불안과 걱정 불면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렵고 우울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군인 K씨는 스트레스 검사에서 80점 이상이 나왔다.

얼굴이 없는 사람이 닭목을 한 손으로 잡고 돼지들을 끌고 포클레인을 향해 가는 모습이 그려진 군인 P씨의 그림 ‘인상적인 사건’, 돼지를 묻는 구덩이 아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그린 군인 L씨의 그림 ‘분서갱유’ 등은 모두 잔인한 도살처분 작업에 대한 충격과 공포가 그대로 드러난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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