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 보내는 희망편지]만화가 꿈꾸는 中1 김태영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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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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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아픈 우리 남매 남들처럼 뛰어놀지 못해… 꿈 이룰 수 있을까요?”

《저는 광주 두암중학교 1학년 김태영입니다. 엄마와 중학교 3학년인 언니,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남동생이 있습니다. 저희 남매는 만성신부전으로 서울대 어린이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언니는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복막투석을 하고 있고 저 역시 약을 먹고 있답니다.

우리 남매는 몸이 아파서 취미라곤 컴퓨터 하기, 텔레비전 보기가 전부였습니다. 저는 줄넘기를 좋아해 초등학교 때 상도 받았지만 지금은 전처럼 잘하지 못합니다. 남들처럼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기 어려운 저희는 그림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엄마는 “너희들 돌잔치 때 셋 다 연필을 잡았는데 그림 쪽에 소질을 보이려고 그랬나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저희 모두 장래희망이 만화가랍니다.

허영만 선생님을 만나서 저의 마음속에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용기와 자신감을 얻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훌륭한 만화가가 될 수 있을까요? ^0^ 김태영 올림》
16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작업실을 찾은 김태영 양(오른쪽) 승대 군 남매가 활짝 웃고 있다. 허 화백은 이들에게 “만화를 그리는 데 지름길은 없다”며 스케치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박영대 기자
16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작업실을 찾은 김태영 양(오른쪽) 승대 군 남매가 활짝 웃고 있다. 허 화백은 이들에게 “만화를 그리는 데 지름길은 없다”며 스케치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박영대 기자
“선 하나 그을 때도 자신있게 쫙!”
“환경 딛고 ‘미래’ 만들어 가야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독서량”

■ 만화가 허영만 화백 조언
16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 만화가 허영만 화백 작업실. 만화가가 꿈인 김태영 양(13)이 허 화백과 마주 앉았다. 김 양은 4B연필을 쥐더니 A4용지에 쓱쓱 그림 한 장을 그려냈다.

“아무거나 그리라고 했더니 너를 그렸구나.” 허 화백의 얼굴에 잠깐 안쓰러운 빛이 돌다가 사라졌다. 김 양은 깡마른 단발머리 소녀를 그렸다.

또래보다 왜소한 김 양은 ‘알포트증후군’이라는 유전성 신장질환을 앓고 있다. 신장 기능이 서서히 약화돼 신부전증으로 진행되며 청력 약화 등의 증세를 동반한다. 근본적인 치료법은 없다. 김 양은 보청기를 써야 하지만 값이 비싸서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그릴 때 망설인 것이거든. 자신 있게 쫙 그어야지. 이렇게.”

허 화백이 김 양의 손을 잡고 스케치하는 법을 가르쳤다. 김 양은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이 없다가 그림 속 소녀처럼 가끔 안경 너머의 눈이 반짝거렸다. 허 화백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중에 유명해지면 네가 오늘 그린 그림이 비싸질 테니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허영만 화백이 김태영 양과 동생 승대 군에게 선물한 캐리커처.
허영만 화백이 김태영 양과 동생 승대 군에게 선물한 캐리커처.
“만화를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냐고? 빨리 끝내고 놀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너희도 숙제 빨리 끝내고 놀고 싶지? 나도 똑같아. 친구 만나고 싶고. 하지만 신문에 잡지에 원고를 줘야 하니까 끝내고 놀아야 돼. 독자하고 약속한 것이거든. 교통사고를 당해도 원고를 넘기고 병원에 가. 그게 약속이란다.”

허 화백은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책을 읽으면 지은이의 경험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며 “훌륭한 만화가가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아이디어 구상하기, 취재하기, 스케치하기, 스크린 톤(만화에서 외곽선 안에 명암, 질감 등을 나타내기 위해 붙이는 스티커) 붙이기 등 만화 작업에 대해 설명했다.

옆에 있던 동생 김승대 군(11)이 신기한 듯 스크린 톤 붙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김 양처럼 만화가가 꿈인 김 군은 누나를 졸라 함께 왔다. 김 양의 언니와 김 군도 알포트증후군을 앓고 있다. 한부모 가정으로 기초생활수급을 받고 있는 김 양의 집은 언니의 병이 악화되자 어머니가 일을 그만두고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언니를 간호하고 있다.

“아저씨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대학을 못 가고 만화를 그리게 됐단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대학을 가지 못한 게 창피했어. 하지만 만화는 누구보다 잘 그리겠다고 마음먹고 불철주야 노력했지. 지금은 내 삶이 자랑스럽다. 미래는 너희들이 만들어 나가는 거야.”

허 화백은 남매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남매의 캐리커처를 그려 선물했다. 남매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화실을 떠나는 남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 화백은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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