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 도모하던 공원 비석앞엔 꽃다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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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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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족 향토사학자 서명훈 씨와 함께 한 의거 당시 ‘안중근 10박11일’

하얼빈서 머문 집터엔 아파트 공사 한창
저격현장 표시 앞에 서니 “코레아 우라” 외침 귀에쟁쟁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 시. 안 의사를 20여 년간 연구해 온 동포 향토사학자인 서명훈 전 하얼빈 시 민족종교 사무국 부국장(79)과 함께 장거(壯擧) 당시 안 의사가 하얼빈에 남긴 10박 11일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1909년 10월 22일 오후 9시 15분 안 의사(당시 31세)와 우덕순(33), 유동하(18) 등 세 사람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들이 머문 곳은 당시 하얼빈의 조선인 단체인 ‘한국민회’의 회장 김성백 씨의 집. 김 씨 집이 있던 썬린제(森林街)는 당시엔 러시아식 단층 목조 주택가였으나 지금은 고층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얼빈 도착 이튿날인 23일 안 의사 일행은 현지 중문판 ‘원동보(遠東報)’에서 ‘전 조선통감 이토가 25일 오후 관성자(현재 창춘·長春)를 출발해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안 의사와 우덕순은 이날 김 회장 집에서 멀지 않은 하얼빈(현재 자오린·兆麟) 공원에서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운다.

다시 찾은 자오린 공원에는 2006년 7월 하얼빈 시가 세운 작은 비석이 서 있었다. 비석 앞에는 누군가가 꽃다발을 가져다 놓았다. 비석 앞뒤에 청초당(靑草塘)과 연지(硯池)라는 친필 글씨가 새겨져 있고 비석 앞면 왼쪽 아래엔 안중근(安重根)이라는 이름과 단지(斷指) 손도장이 빨간색으로 선명했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공원에서 만난 시민 자오팅시(趙庭熙·40) 씨는 “종종 오지만 안중근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안 의사는 이날 밤 ‘장부가’로 널리 알려진 시를 쓰며 거사 결의를 다졌다.

안 의사 일행은 24일 오후 헤이룽장과 지린(吉林) 성의 접경지 기차역인 차이자거우(蔡家溝)로 향했다. 하지만 이토가 탄 기차가 역을 지날 때인 26일 오전 6시경에는 아직 어두워 이토가 누구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고 또 이토가 기차를 갈아탈지도 몰라서 안 의사는 더 확실한 거사를 위해 25일 혼자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머문 역의 반지하 상점은 지금 창고로 바뀌었지만 역사(驛舍)는 지금도 그대로다.

26일 아침 안 의사는 일본인들 틈에 끼어 대담하게 하얼빈역으로 들어갔다. 새로 지은 현재의 하얼빈역 거사 현장에는 안 의사가 저격 당시 서 있던 곳과 이토가 쓰러진 곳이 바닥에 표시돼 있다. 안 의사는 거사 후 붙잡히면서 저항하지 않고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를 외쳤다.

역사 내 헌병 파출소에 억류돼 있던 안 의사는 그날 밤 일본 총영사관으로 옮겨졌다. 총영사관이 있던 화위안제(花園街) 97호. 후에 ‘하얼빈 시 화위안’ 소학교가 된 당시 건물은 4년 전 모두 헐렸다. 지금은 새 건물 벽에 ‘일본 영사관 원지(原址)’라는 안내판만 붙어 있다. 옛 건물에는 지하실에 감옥과 고문실 등이 남아 있다. 서 씨는 “이 건물을 사서 보존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고 안타까워했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6박 7일간 조사를 받고 11일 오전 11시 25분 우덕순 유동하 등 8명과 함께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송됐다. 안 의사는 이듬해 3월 26일 이곳에서 형이 집행돼 생을 마쳤다.

하얼빈=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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