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기부할 곳 이렇게 없나요”

  • 입력 2009년 10월 12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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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시민운동으로 마련한첫 사회환원금 3억원
기부받은곳 유용-전용에 10년간 기탁-환수 우여곡절
결국 베트남 돕기 사용키로

“국내 단체엔 기부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는 믿을 수가 없어요.”

온라인시민단체인 사이버행동네트워크(사이버행동)의 황용수 대표(41)에게 3억 원의 기부금은 ‘영광’이자 ‘상처’이기도 하다. 황 대표는 꼭 10년 전인 1999년 10월 청바지업체 ‘닉스’가 마련한 도메인 공모에서 사전에 수상자가 결정돼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해 누리꾼 수만 명과 함께 해당사로부터 사과문과 3억 원의 사회환원금을 받아낸 주인공이다. 황 대표를 비롯한 누리꾼들은 이 돈을 국내 사회단체에 기부하기로 했고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국내 ‘사이버운동’의 효시로 평가했다. 그러나 영광도 잠시뿐이었다.


사이버행동은 국내 최초의 사이버시위로 환수한 3억 원을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해외 난민들과 베트남 소수민족 어린이를 돕는 교육지원사업에 쓰도록 할 예정이라고 11일 밝혔다. 황 대표는 “의미 있는 돈인 만큼 꼭 국내에 도움이 되게 쓰고 싶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3억 원은 곧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영국의 자선단체 옥스팜에 전달된다.

지난 10년 닉스가 환원한 3억 원은 유랑을 거듭했다. 사이버행동은 1999년 12월 민간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 이 돈을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데 쓰자는 누리꾼들의 뜻에 따라 북한 어린이들에게 컴퓨터를 보낼 예정이었다. 얼마 뒤 단체에 컴퓨터 배송 여부를 문의한 황 대표는 깜짝 놀랐다. 컴퓨터 대신 비료를 사서 보냈다는 것이었다. 테러지원국에 전략물자 유출을 금지한 ‘바세나르협정’에 따라 컴퓨터를 보낼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황 대표는 “그렇다면 기부자에게 상의라도 했어야 옳다”며 “그나마 이름 있는 단체라 믿고 맡겼는데 실망이 컸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운영진과의 회의를 거쳐 3억 원을 환수했다.

사이버행동은 누리꾼 투표를 통해 새로운 기부처를 물색한 뒤 2002년 3월 국내 최초의 정보고등학교인 염광여자정보교육고(현 염광여자메디텍고)를 선정했다. 일반 단체라면 몰라도 학교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올해 4월 학교가 학업진단평가 선택권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교사 한 명을 파면하자 사이버행동 측은 학교를 규탄하며 장학금 명세서를 요구했다. 도착한 문서는 엉터리였다. 황 대표는 “두 해 연속으로 장학금 지급대상자 수십 명의 명단이 똑같다거나 장학금 최초 기안자의 서명이 다른 식으로 얼핏 보기에도 급조한 문서임이 역력했다”며 “곧바로 서울시교육청과 금감위에 내사를 촉구했다”고 말했다. 이어 나온 결과는 참담했다. 학교는 차명계좌를 만들어 장학금을 분산 예치하고 일부는 전용해 학교장 대출금을 담보하는 데 썼던 것이다.

사이버행동은 7일 기부금 3억 원을 돌려받았다. 황 대표는 “내가 청바지업체의 부도덕성을 비판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 사이버시위를 이끈 ‘ihateifree.com’은 한국유네스코가 선정한 보존 대상에 올랐다는데 그렇게 뜻 깊은 과정에서 탄생한 돈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난 10년의 기부는 나에게 상처만 남겼다”며 “우리나라에도 기부자의 뜻을 존중하는 투명한 기부문화가 조속히 뿌리 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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