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좋은 노조’는 없다

  • 입력 2009년 9월 10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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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노동운동의 ‘전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아닐까 싶다. 꼭 20년 전 전교조가 결성되어 촌지 거부와 학교비리 근절 운동을 벌이자 학부모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우리 노동운동 역사에서 전교조만큼 다수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낸 노동조합은 없을 것이다.

공익 앞세운 ‘포장 전술’

그러나 전교조는 변신을 거듭하면서 교육보다는 조합원과 조직의 이익을 앞세우는 단체로 바뀌어갔다. 다수 국민이 찬성하는 교원평가제에 전교조가 반대해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전교조에 교원평가제는 조합원의 신분 안정을 해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교조를 향해 애정 어린 시선으로 미련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제발 초심으로 돌아가 줄 수 없겠니?’라며 신신당부를 하기도 한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길을 벗어났는데도 말이다. 초창기 ‘각인 효과’는 이렇게 대단하다.

2002년 출범한 공무원노조는 전교조를 벤치마킹했다. 노조를 만든 뒤 공직사회의 부패와 비리를 감시하겠다고 나섰다. 솔깃하게 들리지만 착시 현상이다. 누가 감시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감시자 역할을 자처한 꼴이다. 우리는 깨끗하고 다른 사람은 더럽다는 오만도 깔려 있다. ‘가장 안정적인 직업인 공무원에게 노조가 왜 필요하냐’는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운 것이다.

노조의 본질인 집단 이기주의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익’이라는 외피(外皮)로 가려 놓는 ‘포장 전술’은 일반 노조에서도 즐겨 사용된다. 공기업 노조들이 공기업 민영화에 반대하며 ‘민영화를 하면 수돗물 값이 몇배 오르고, 병원에서 수술을 한번 받으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며 국민에게 겁을 주는 것도 한 가지 예이다. 자신들의 시위가 민생을 걱정해서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이다. MBC나 KBS 같은 공영방송 노조들이 ‘방송 민주화’를 입에 달고 사는 것도 그렇다. 민주노총은 ‘민주화 깃발’이 세워지는 시위장소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 역시 가장 민주적인 노조임을 스스로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전략이 우리 사회에 꼭 부정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조 활동을 하면서 부패 감시와 국민 생활의 개선, 민주화에까지 신경을 써준다면 나라 전체를 위해 고마운 일이지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국민은 이런 겉모양이 노조의 속셈과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이후 국내 노동운동이 본격화된 지 20년이 넘었다. 그동안 노조는 ‘약자’에서 어느 정도 탈피했다. 노조 쪽이 사용자보다 더 큰 힘을 갖는 회사도 있다. 이 정도라면 국민이 노동운동을 어떤 선입관 없이 균형감각을 갖고 바라볼 시점에 이른 것이다.

현명한 노사관계를 이끌어내야

노조가 자꾸 공익을 들고 나오는 것은 국민 여론이 노동운동의 성패를 좌우하는 키를 쥐고 있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노조의 어떤 요구도 국민 반응이 차가우면 이뤄지기 어렵다. 전교조의 교원평가제 반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전교조의 추락을 부채질했다. 노조의 사익(私益)을 가급적 뒤로 감추고 공익을 앞세워야 노조 활동이 순조롭다는 점을 눈치 챈 것이다.

과격 투쟁의 대명사 민주노총에 속해 있는 개별 노조들이 속속 이탈하면서 ‘나쁜 노조’와 ‘좋은 노조’가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여러 측면을 심사숙고하는 ‘현명한 노조’는 존재할 수 있지만 ‘좋은 노조’는 없다. 노조는 조합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국가경쟁력 강화의 최대 걸림돌인 노사 문제를 안정시키려면 국민의 쿨한 시선이 필수이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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