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내 이름은 ‘꼴등’

  • 입력 2009년 6월 2일 02시 59분


《“제 성적은 꼴등이에요.”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말할 땐 반 38명 중 33∼36등을 한다고 해석하면 된다. 자기비하와 자조를 섞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꼴등은 자신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까? 꼴등은 말이 없다.

“이것도 모르냐”는 면박이 두려워 교사에게 질문도 못할뿐더러, 아무도 그들에게 “너 몇 등이냐”고 묻지도 않으니 말이다. 전교 1등을 하기도 어렵지만, 전교 꼴등을 도맡아 하기도 어렵다. 꼴등에겐 어떤 문제가 있을까? 그들에겐 △목표와 자신감 없음 △집중력 없음 △기초학업 부실 △외부 유혹에 취약 △부모의 관심 부족이란 공통점이 있다. 중상위권, 중위권, 하위권이 가진 문제점을 모두 합한 ‘종합 선물세트’라고나 할까. 하지만 처음부터 꼴등인 학생은 많지 않다. 자기 문제점을 진단하지 않고, 적절한 솔루션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이 ‘최악의 등수’는 그들을 찾아온다. 일반계 고등학교, 특목고, 과학고의 꼴찌들을 만났다. 그들은 어떻게 미래를 바꿀 것인가.》

○ 수학 12점, 게임에 미쳤다

스스로 ‘게임 중독’이라고 진단하는 서울의 한 고교 1학년 김모 군(16). 오전 7시에 일어나 등교 직전인 8시 반까지 방에서 컴퓨터 게임 ‘마비노기’를 한다. 수업 중에는 어떻게 하면 게임 레벨을 올릴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너희들 매일 매일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교사의 조언이 그에게는 “게임을 매일 열심히 하라”는 말로 바뀌어 들린다. 중 2 때까지 전교 30등 안에 들었다는 김 군. 게임에 깊이 빠졌던 중 3 기말고사에서 수학 30점을 받았다. 이번 중간고사에선 수학 12점. 꼴등이었다.

“풀긴 다 풀었어요. 근데 채점을 해보니 다 틀렸더라고요. 이유는 모르겠어요.”(김 군)

그는 하루에 7, 8시간 게임한다. 등교 전과 방과후 부모님이 귀가하기 전인 오후 4∼7시, 그리고 학원에 다녀온 오후 10시부터 김 군은 제 방에 들어가 새벽 3, 4시까지 게임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멍해요. 학교에 와서도 피곤하니까 수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요. 그냥 멍하게 앉아 있어요.”(김 군)

또 다른 일반계고 1학년인 이모 군(16·경기 고양시)은 요즘 당구에 몰입 중. 수업 시간에 떠들거나 다른 친구들처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수업을 듣다 보면 칠판이 당구대로 보인다. 선생님의 필기 한 획이 공이 굴러가는 길로 보인다. 수학공식과 영어단어가 빼곡해야 할 연습장은 당구공식을 연습하기 위해 그은 줄로 가득하다. 중 2 때까지는 부모도 이 군의 성적에 관심이 있었지만 부모가 맞벌이를 시작하면서 관심은 격감했다. 이 군은 소위 말하는 문제아나 반항아도 아니었다. 방과후 친구들과 PC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축구, 농구를 하며 놀았다. 그러는 사이 자신이 꼴등이라는 사실에 무덤덤해졌다.

“부모님이 퇴근하는 오후 8시쯤엔 제가 학원에 있고, 제가 귀가하는 자정쯤엔 두 분 다 주무세요. 특별히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닌데 성적 이야기는 잘 안하게 돼요.”(이 군)

○‘왜 이래? 너 원래 이렇지 않았잖아?’

“내가 남들보다 못하다는 생각, 해도 안 될 거라는 생각을 난생 처음 해봤어요.”

한 외국어고 2학년 김모 군(17)은 지난해 느꼈던 좌절감을 털어놨다. 중학교 때까지 전교 10등 밖으론 나가본 적 없는 김 군이 외고에 입학해 처음 받았던 1학기 중간고사 성적표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낯선’ 등수. 뒤에 몇 명 없었다.

“나는 특목고니까 ‘아무리 못해도 ○○대학은 가겠지’ ‘꼴등을 해도 일반계 중상위권은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문제였어요.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다는 친구들과 영어, 수학, 과학 영재들 틈에 있으니 전 그저 평범한 것보다도 못한 애였죠.”(김 군)

자만은 좌절로 이어졌다. ‘공부 말고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춤 동아리에도 기웃거렸다. 그나마 자신 있던 영어회화에서 내신 8등급을 받았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결코 저들을 앞지를 수 없다’면서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

선생님과 친구 사이에서도 ‘어차피 못 하는 애’로 인식됐다. 수행평가 과제물 평가를 받은 날, 10점 만점에 최소한 5점 이상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던 과제에서 3점을 받았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성적 이의신청을 하겠다고 하니 친구들이 “너 원래 그렇잖아” “그냥 점수 좀 깔아 줘”라고 말했다. 누구의 점수가 올라가면 누군가는 떨어지는 상대평가. ‘어차피 꼴등인데 웬 수선이냐’는 친구들의 반응에 더 무기력해졌다.

또 다른 특목고의 고 3 전교 꼴등인 정모 양(18)은 “성적이나 등수를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특목고 학생들의 불문율”이라고 귀띔했다. 가장 친한 친구도 몇 점이고 몇 등인지 잘 모른다고 한다. 정작 정보를 주고받으면 스트레스만 받으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정 양은 “친구들 전부 국내외 명문대학에 가고 나만 덩그러니 남겨질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재수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일반계고 학생들보다 크다”면서 “너무 치열해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해 전학을 가거나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수능 준비를 하는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 자다 걸리면 문제 푸는 척하고 다시 잔다

고 2 조모 양(17·경기 남양주시)은 이제까지 ‘공부 계획’이란 것을 단 한 번도 세운 적이 없다. 얼마 전 수능 모의고사 때 조 양은 언어영역 시험이 시작된 후 20분 만에 50문제를 ‘찍은’ 뒤 엎드려 잤다. 담임교사가 “더 풀어”라며 깨우자 푸는 척하다 다시 잤다. 조 양은 “시험지를 받으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몰라서 답답하다. 아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조 양은 “어떻게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편으로 온 성적표를 쥐고 “왜 이러느냐. 공부 좀 해라. 다 널 위해 하는 소리다”라는 엄마의 말에 마음이 찢어진다. 하지만 국어는 교과서를 아무리 읽어도 문제의 ‘보기’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고, 수학은 중학교 때부터 안했던 과목이라 전혀 감이 없다. 영어는 단어만 외우면 될 것 같아 열심히 외웠는데, 단어를 알아도 지문은 해석이 되질 않는다.

조 양은 ‘지난 중간고사 때도 내가 우리 반 평균점수를 다 깎아먹었다’는 자책에 사로잡혀있었다. 조 양은 “독서실에 엉덩이에 땀나도록 앉아 있는데 집에 와 생각해보면 별로 한 게 없다”며 “차근차근 공부하고 싶은데 늦었다는 불안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털어놨다.

꼴등, 그렇다면 어찌 탈출할 것인가.

봉아름 기자 er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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