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교장의 잠못드는 밤

  • 입력 2009년 5월 12일 19시 02분


서울 강북의 한 인문계고 A 교장은 요즘 새벽 4시 이전에 잠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2월에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가 공개된 이후 나타난 증상이다. '내년부터는 고교선택제가 도입되고 학교별 성적도 공시해야 한다니….' 생각이 복잡해 자정까지 뒤척이다 잠이 들어도 새벽녘이면 알 수 없는 압박감에 눈이 절로 뜨인다.

인근 대여섯 개 고교 가운데 A 교장의 고교는 학부모들의 선호도가 낮은 학교로 꼽힌다. 그가 부임한 뒤 두발단속 등 생활지도를 강화했지만 여전히 '폭력 학생'이 많다는 이미지가 남아 있다. 교육청이 실시한 고교선택제 시뮬레이션 결과도 나쁘다는 소문이 돈다.

서울 강남의 또 다른 인문계고 B 교장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동네 집값에 걸 맞는 명성을 쌓아야 한다는 학부모들의 압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부 학부모들은 '방과후학교 강사를 OO로 교체하라', '교사 누구, 누구를 모아 우수반을 지도해 달라'는 식의 구체적인 요구까지 한다. 교사들은 우열반 구성, 방과후학교 담당을 놓고 매달 일정표를 짤 때마다 신경전을 벌인다. B 교장은 "교장실 전화벨이 울리면 초조해진다"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처란 고작 인터넷에서 '갈등 중재법'같은 동영상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학교자율화 추진방안 확정 발표를 일주일 앞둔 12일. 일선 고교 교장들은 '불면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정부가 학교 교육을 다양화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학교 자율화를 추진한다고 선포한 이래 주변 여건이 숨가쁘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상상조차 못했던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와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가 지역별로 줄줄이 공개됐다. 교육기관의 정보공개법이 생겨나 내년부터는 학교별 학업성취도까지 낱낱이 알려야 한다.

광주의 한 고교 교감은 "교육과학기술부가 학교 별, 시군구 별 성적을 공개하지 않아도 언론이나 학원을 통해 며칠 만 지나면 학교 별 순위도 대략 알려진다"며 "학교 순위가 막 터지니까 교장선생님이 예전보다 학부모 대하기를 꺼려하시는 것 같다"고 전했다.

다음주 확정될 학교자율화 방안 가운데 모든 학교에서 교장이 교사를 20%까지 초빙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교장들에게는 '뜨거운 감자'다. 취지는 좋지만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수한 교사를 얼마나 스카우트해서 학부모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냐에 따라 교장의 입지가 달라질텐데 초빙교사라고 해서 월급이나 복리후생을 더 챙겨줄 방법도 없다. 자기 학교의 우수한 교사를 뺏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설령 교장이 우수한 교사를 초빙해 온다고 하더라도 기존 교사들과의 위화감이 생기지나 않을까, 학생들이 기존에 있던 교사들을 덜 존경하지나 않을까 등등 교장이 전전긍긍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교육과학기술부는 학교장 중임심사까지 강화한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4년 임기를 마친 뒤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대부분 한 차례 중임을 했다. 2005년 이후 서울 지역에서 중임심사에 탈락한 교장이 단 한 명뿐일 정도다. 하지만 이제는 법령상 규정된 각종 학교 평가의 결과를 해당 교장의 중임심사에 반영하겠다는 것이 교과부의 복안이다. 학교의 성적이 중임심사에 직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놓인 학교장들의 불만은 "늘어나는 의무에 상응하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형식적인 자율뿐이지 실질적으로 학교장이 쓸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주장이다. 우수한 교사를 초빙하려면 뒤쳐지는 교사를 내보내야 하는데 교장에게 인사권이 없으니 무능하거나 나태한 교사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 교과별 수업시수를 20%씩 증감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해도 "과목마다 교사들이 버티고 있는데 무슨 과목을 줄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교장이 많다.

서울 K고 교장은 "학교자율화나 고교선택제가 고교 발전을 위해 필요하지만 우선 교장에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도구를 보장해준 뒤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수한 초빙교사에게는 인센티브를 줄 수 있도록 하거나, 부적격교원에 대한 제재수단을 마련해달라는 지적이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