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와 악수만 한 뒤 盧 “시간 너무 늦었다” 대질 피해

  • 입력 2009년 5월 1일 02시 56분


고개 숙인 盧 30일 오전 8시 대검찰청에 출두하기 위해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를 나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국민에게 사과하고 있다. 김해=전영한 기자
고개 숙인 盧 30일 오전 8시 대검찰청에 출두하기 위해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를 나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국민에게 사과하고 있다. 김해=전영한 기자
■ 盧 전대통령, 박연차 대질신문 거부

盧측 “예우 아니다”… 대질 원하는 朴 외면

검찰 “朴 기존진술 유지… 공소유지 청신호”

30일 오후 11시경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120호실. 피의자 신분으로 10시간 남짓 조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출입문 쪽을 바라보다 만감이 교차한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파란 수의를 입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51m²의 좁은 방에서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탓이다. 21년 동안 정치인과 후원자로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두 사람은 이제 600만 달러의 뇌물 수수자와 공여자로 대질조사를 받는 짓궂은 운명을 맞이할 뻔했다. 그러나 대질조사를 원한 박 회장과는 달리 노 전 대통령이 “시간이 너무 늦었다”면서 거부해 대질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 박 회장은 대질 원하는데 노 전 대통령이 거부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부분은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 몫으로 2007년 6월 100만 달러와 2008년 2월 500만 달러 등 모두 600만 달러를 건넸다고 주장한 의혹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이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증거자료를 들이밀며 끈질기게 추궁했지만 “기억에 없다” “아니다”는 식의 부정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박 회장의 주장과 노 전 대통령의 진술이 평행선을 긋자 검찰은 두 사람의 대질조사라는 초강수를 선택했다.

노 전 대통령이 최근 홈페이지에 “기나긴 싸움이 되겠지만 박 회장이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하는 특별한 사정을 밝힐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친 점도 감안했다. 검찰로서는 박 회장의 진술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검찰 안팎에서 박 회장은 ‘박 검사’로 불린다. 그동안 몇 차례 대질조사에서 박 회장은 금품을 받은 사실 자체를 부인하던 정치권 인사와 관료에게 “다 끝났으니 사실대로 털어 놓으라”면서 당사자를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상대방이 박 회장과의 금품 수수를 시인하든지, 부인하든지 관계없이 박 회장이 대질조사에서 기존 진술을 그대로 유지한 점은 법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검찰의 공소 유지에 청신호가 된다”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객관적인 물적 증거가 없는 뇌물 사건에서 뇌물 공여자의 일관된 진술만큼 검찰에 좋은 ‘무기’는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 회장이 객관적인 정황 증거로 뒷받침되는 사실을 법정에서도 일관되게 진술한다면 노 전 대통령에게 유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측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아니며, 시간도 너무 늦었다”면서 대질조사를 거부했다.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과 잠깐 동안 만났지만 600만 달러의 뇌물을 놓고 얼굴을 붉히는 장면은 가까스로 피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통상 절차에 안 따라서 아쉽다”고 밝혔다.


▲멀티미디어기자협회 공동취재단

○ 부드러운 출발부터 최후의 카드까지

오후 1시 40분경 우병우 중수1과장은 노 전 대통령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편안하게 하자”며 양복 윗도리를 벗을 것을 제안했다. 당초 검찰은 자백을 받기보다는 노 전 대통령이 최대한 많은 말을 하게 한 뒤 진술의 허점이 드러나게 하는 전략을 세웠다. 우 과장이 ‘피의자’ 대신 “대통령님께서는∼”이라고 질문하면 노 전 대통령이 “검사님이∼”라고 답변할 정도로 차분하게 조사가 진행됐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5시간 넘게 버스로 이동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없지 않았으나 검사의 신문에 차분하게 답변했다. 노 전 대통령은 조사 시작 직전과 휴식 시간에는 담배를 피우며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홍만표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은 “그동안 취합된 증거자료를 제시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진술의 미비함을 점검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면서 “노 전 대통령이 진술을 거부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검찰은 경호상의 문제 등으로 노 전 대통령을 다시 소환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그동안 준비한 ‘히든카드’를 순차적으로 공개했다. 일반적인 대통령의 직무 범위와 권한에 대해 먼저 신문해 분위기를 조성한 뒤 100만 달러, 500만 달러 등을 순차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600만 달러 의혹을 시종일관 부인하자 검찰은 대질조사 카드를 빼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박 회장의 진술뿐만 아니라 정상문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이 시인한 부분까지 부인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검찰은 정 전 비서관이 600만 달러를 전달할 때 박 회장과 노 전 대통령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박 회장의 베트남 화력발전소 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이어서 정 전 비서관이 시인한 사실을 노 전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 쟁점별로 공격수와 수비수 바꿔

조사 쟁점에 따라 양측은 전담 검사와 변호사를 교대해 가며 양보 없는 법리 공방을 벌였다. 우 과장과 노 전 대통령만 시종일관 함께했다. 대통령의 직무 범위와 역할 부분은 김형욱(사법시험 41회), 100만 달러 의혹은 이주형(40회), 500만 달러와 정 전 비서관이 횡령한 12억5000만 원 부분은 이선봉 검사(37회)가 각각 우 과장 옆에 배석해 조사에 나섰다. 2004년 대선자금 수사, 2006년 사행성 게임비리 등을 수사했던 조재연 부부장(25회)은 수사 상황을 지켜보면서 쟁점별로 추궁할 증거자료 등을 분류하는 역할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도 500만 달러 수수 의혹은 전해철 전 대통령민정수석에게 방어를 맡겼고, 나머지 부분은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조언을 받았다. 임채진 검찰총장과 이인규 중수부장 등 대검 지휘부도 조사실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를 통해 노 전 대통령 조사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수시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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