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신기관

  • 입력 2009년 4월 13일 02시 56분


◇신기관(프랜시스 베이컨·한길사)

오로지 경험을 통해 진리로!… ‘귀납의 탄생’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헬스장보다는 병원이 우선이다. 병을 고치고 난 후에야 진수성찬도 살로 가는 법. 잘못된 곳을 고치지 않고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인간 지성의 역사 전체를 새롭게 개혁하겠노라며 큰 야망을 품은 자라면 어떨까. 파괴와 건설의 엄청난 역사가 예상된다.

그런데 약 400년 전, 이 대단한 일에 도전한 사내가 있었다. 영국에서 대법관을 역임하며 여왕의 다음 가는 권력까지 누렸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그는 대표 저서 ‘신기관’에서 인간의 야망을 세 등급으로 보았다. 첫째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잡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 나라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 둘 모두 천박하고 탐욕스러운 야망이다. 반면 그가 꿈꾸었던 가장 고귀한 야망은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학문과 기술로 자연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그의 인생 궁극의 목표였다.

문장력과 유머 감각이 뛰어난 베이컨은 기존 학계에 맞서면서도 재미있는 비유를 쓴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실험만으로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는 광범위한 기술자 집단들은 ‘개미’라며 나무란다. 경험 사례를 모으기만 할 뿐 올바른 추론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구체적인 경험이나 실제 사례를 중요시 여기지 않고 일반 원리로부터 현실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연역론자도 비판하였다. ‘거미’에 비유된 이들 전통적 학자들은 실제 자연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자기 안의 지식으로 사실을 예단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꿀벌’의 방법을 강조했다. 자연에서 얻은 경험 지식을 바탕으로 지성의 힘을 잘 활용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꿀벌다운 진리 소화법이다. ‘신기관’이라는 제목도 이와 관계가 있다. 인간의 정신은 진리를 만들어내는 기관이므로 새로운 기관(정신)이 수립되어야 진리의 빛을 볼 수 있다.

베이컨이 학문의 새로운 건설에서 내건 차별화된 대표상품은 바로 ‘귀납법’이다. 우리가 관찰한 것들과 실험을 통해 얻은 경험을 모아서 올바른 규칙을 따라 일반 원리를 향해 한 계단씩 올라가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많은 지성인들이 올바른 학문을 하지 못했을까. 꼼꼼하고 치밀한 베이컨이 분석한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우선 인간 종족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태생적 한계가 있다. 바로 종족의 우상이다. 자연을 자꾸만 인간 기준에서 보면 울퉁불퉁한 거울처럼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인데 개인적 차원에서 후천적 교육이나 경험에 의해 잘못 형성된 기질들이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준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으로,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의미가 왜곡되거나 허술한 논증인데도 쉽게 속아 넘어가는 문제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베이컨이 가장 비판했던 대상이다. 고대의 거장으로 통하는 사람의 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학계의 관행을 보면서 혁신을 독촉하는 쓴 소리다.

결국 그는 과학의 시대를 연 근대정신의 개척자이며 설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지식이 힘이다”라고 했던 베이컨의 유명한 말은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아니라 그의 철학을 대변하는 핵심 명제이다. 올바른 귀납추론으로 얻은 자연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힘을 주리라는 뜻이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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