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테이션]3·1 함성의 현장, 어딘줄도 모르고…부끄러운 ‘90돌’

  • 입력 2009년 2월 18일 17시 28분


(박제균 앵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월 18일 동아뉴스 스테이션입니다.

올해는 3.1운동 90주년입니다. 3.1 운동은 단지 1919년 3월 1일만의 사건이 아니라 그해 4월까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민족의 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방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지금까지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김현수 앵커) 동아일보는 '3·1운동 90돌, 다시 찾은 현장'을 연재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문화부 윤완준 기자와 함께 경기지역의 3.1운동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윤 기자, 경기지역의 3.1운동 현장을 다녀왔죠? 어디어디인가요?

(윤완준) 경기 지역 3·1운동 역사를 10년간 연구하며 희귀 자료를 발굴해온 수원대 박환 교수와 함께 경기 안성시 양성면과 경기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우정면 화수리의 3·1운동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지금 화면에서 보시는 이곳은 경기 안성시 양성면의 양성초등학교 뒤편입니다. 지금은 논으로 변했지만 90년 전 4월 1일 밤 양성면과 인근 원곡면 주민 2000여 명은 이곳에 있던 일제 경찰 주재소를 불태웠습니다.

만세운동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서류와 집기를 꺼내 불태운 일제 면사무소와 우편소는 현재 KT 안성지점과 주택가로 변했습니다.

안성은 황해도 수안, 평안북도 의주와 함께 3·1운동 3대 항쟁지로 꼽히는 곳이지만 이들 현장에는 90년 전 함성을 전할 표지석 하나 없습니다.

취재에 동행한 수원대 박환 교수는 2006년, 이곳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주요 지점을 일제가 표시한 현장 검증기록, 파괴된 양성면 경찰 주재소 도면 등의 자료를 발굴했습니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은 최근의 '국내 사적 실태 조사'에서도 이들 3·1운동 현장의 정확한 위치를 반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개발 과정에서 3·1운동 터가 하나둘 사라질 우려가 높습니다.

(박앵커) 3.1운동 터가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군요, 화성시 송산면은 어떤 운동이 일어났던 곳입니까?

(윤완준 기자) 네, 일본군이 30여명을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은 시청자 여러분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바로 이 학살사건이 당시의 격렬했던 화성지역의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기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는 1919년 3월 26일에서 28일까지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만세운동을 주도한 홍면옥 선생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힌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를 처단한 곳입니다.

전국적으로 3·1운동 과정에서 일본 순사를 처단한 곳은 이곳과 화성시 우정면 화수리뿐인데요. 그만큼 화성 지역의 3·1운동이 격렬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당시 만세운동 대열의 함성이 울려퍼졌던 장터 거리는 현재 사강시장을 가로지르는 도로로 변했습니다. 순사부장을 처단한 현장에는 수협 사강지점이 들어섰습니다.

이곳이 3·1운동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없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이곳 주민들은 3·1운동 정신을 지난해부터 대대적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화성시의 지원을 받아 대형 기념탑을 세웠고 사강시장 도로에서는 3·1만세운동과 노구치 처단 재현 행사를 열었습니다. 올해 3월 1일에도 같은 행사를 열 예정이라고 합니다.

(김현수 앵커) 뒤늦게 기념탑이라도 세웠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화성시 우정면 화수리 지역에서는 어떤 운동이 일어났었나요?

(윤완준 기자) 네, 1919년 4월 3일 화수리에서는 각 지역에서 모인 주민 2000여 명이 경찰 주재소를 불태웠습니다. 이곳은 화성 석포리의 유교, 수촌리의 기독교, 방죽리의 천도교, 장안리의 천주교 등 모든 종교 세력이 결집한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일제는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에 불을 질렀고 주민 70명을 잡아 고문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정한경 선생이 "완전 무결하게 황폐한 모습이었다. 단 한 장의 이불, 한 가마니의 쌀, 그리고 단 한 개의 그릇, 숟가락도 성한 것이 없었다"고 묘사할 정도였습니다.

인터뷰) 박환 수원대 교수

"1919년 4월 3일, 이곳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순사 가와바다를 응징하는 대단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보이는 언덕에 우정면, 그리고 장안면 주민들 약 2천여명이 운집을 했습니다. 이 당시 우정면과 장안면 지역에는 약 2천호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는 것으로 보아 각 집안에 적어도 한사람씩은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제균 앵커) 윤 기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우리가 3·1운동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부끄러워지는군요. 역사를 기억해야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3·1운동 90돌을 맞아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윤 기자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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