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남편에 경종” 여성계 반색

  • 입력 2009년 1월 17일 02시 58분


■ 부산지법 ‘부부간 강간죄’ 첫 인정

《부부간의 강간죄를 처음으로 인정한 16일 부산지법의 판결은 부부 사이라 하더라도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당하게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관계를 맺을 때에 상대방의 능동적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물리적 약자인 아내로서는 폭력을 앞세운 일부 남편의 성폭력으로부터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판례가 마련된 셈이다. 법조계와 여성계는 이날 판결에 대해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1970년 ‘강간죄 성립 안된다’ 판례 뒤집어

선진국도 대부분 ‘性的 자기결정권’ 존중

일부선 “부부생활 법적 해결 무리” 반론도

▽“국가 개입 아닌 사후 수습”=이번 판결은 ‘부부 사이에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1970년 대법원 판례를 뒤집었다. 이 대법원 판례는 40년째 이어져 왔다.

그동안 부부 강간죄에 대한 고소사건은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수사가 착수되면 고소를 취하하는 사례가 많았다. 설령 수사가 이뤄지더라도 검찰이 남편을 기소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부부 사이의 사생활에 해당하는 성문제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 탓이었다.

이와 관련해 부산지법 재판부는 16일 “부부 강간에 국가가 개입해 부부 관계를 파탄 내는 게 아니라, 강간으로 혼인 관계가 이미 파탄됐기 때문에 이 죄를 적용한 것”이라며 “따라서 부부 사이에서 발생한 성적 폭력 사태를 법의 원리에 따라 수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진국의 경우 부부간의 강간이나 강제추행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은 부부 강간을 범죄로 다루고 있고 피해자는 민사소송도 낼 수 있다. 프랑스와 영국도 각각 1984년과 1991년 부부 강간을 인정했다. 독일은 1997년 형법 개정 과정에서 강간죄의 대상에서 ‘혼인 외 관계’ 조항을 삭제해 강간죄의 피해 대상에 아내를 포함시켰다.

▽법조계와 여성계는 “환영”=부부간 강간과 관련한 재판을 맡고 있는 형사부와 가정법원 판사들은 “당연한 판결”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예전부터 대학과 사법연수원에서 부부간 추행과 강간은 당연히 인정돼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며 “이번 판결을 반대하는 판사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지법 박주영 공보판사는 “강간죄 보호 대상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고 보는 데 큰 이견이 없다”며 “이런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 법률상 아내라고 하더라도 강간죄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부부 사이라도 원치 않는 성적행위는 범죄임을 확인한 것으로 ‘내 아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부산여성의 전화’도 “지금까지의 부부간 성폭력에 대한 사법적 관행을 깨뜨린 선도적인 의미를 갖는 판결”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부부 관계의 특수성과 민법상 동거의 의무 등을 내세워 강간죄 적용은 무리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제3자가 판단하기 힘든 부부 생활의 영역까지 법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부산=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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