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대덕밸리 이야기/<15>한국천문연구원

  • 입력 2008년 12월 25일 06시 58분


1990년대에 70대 남자인 A 씨가 대전 유성구 대덕연구단지의 한국천문연구원 안영숙(현재 고천문연구그룹장) 연구원을 찾아왔다. 그는 “성폭행범으로 지목된 아들의 누명을 벗겨 달라”며 “그 여자가 밤 9시경 불빛이 없는 공원에서 성폭행을 당했지만 달 때문에 얼굴을 분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안 연구원은 사건의 날짜를 음력으로 환산한 결과 그믐에 가까워 새벽에야 달이 뜬다는 증명서를 떼 줬다.

안 그룹장은 “그 후 연락이 없어 사건이 어떻게 결론지어졌는지 모르지만 A 씨의 주장대로라면 아마도 누명을 벗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고천문연구그룹은 아무런 관계가 없을 듯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달력과 일출 일몰 등 생활천문을 다루기 때문이다. 23일 기자가 취재를 하러 갔을 때도 문의 전화가 수시로 걸려왔다.

▽“요즘 배달되는 달력 우리가 만들어요”=고천문연구그룹은 매년 2월 양력과 음력, 절기 등 월력요항을 확정해 반영한 다음 해의 달력을 홈페이지(www.kasi.re.kr)에 발표한다. 2050년까지의 달력이 만들어져 있지만 천체운동이 일정치 않아 조금씩 보정(補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음력으로 결정되는 설, 석가탄신일, 단오, 추석 등은 국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쳐 중요하다. 2005년 12월 천문연구원은 이례적으로 “2006년의 정확한 설날은 1월 29일”이라고 발표했다. 일부 비공식 만세력을 이용한 인터넷과 휴대전화 달력이 설날이 30일인 것처럼 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력의 매월 1일은 지구-달-태양이 일직선으로 늘어서는 합삭일로 삼는데 이를 잘못 계산한 결과였다.

고천문연구그룹이 제공하는 태양고도와 방위각은 건축 분야와 농업, 태양에너지 이용, 진남북 방향설정 등에 활용된다. 인삼농가는 태양의 각도를 잘 따져 해가림시설을 설치해야 적당한 일조량과 온습도를 유지할 수 있다.

합삭시기와 절기는 조수예보 동양철학 점성 어로 등에, 달빛(월광)은 어로와 등산, 군부대 작전 검찰 경찰의 사건사고에 활용된다. 군부대에서는 작전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여명과 달빛에 대한 문의를 많이 해온다.

▽고천문학이 현대천문학 문제 풀어냈다=고천문연구그룹은 과거의 천문자료를 통해 현대천문학의 문제도 풀고 있다. 이 그룹에 따르면 분석방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의 10∼30%는 천문에 관한 자료이다. 충실도도 높고 분량도 많아 세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양홍진 선임연구원 등은 2005년 890광년 떨어진 물병자리 ‘아르 아쿠아리’라는 별의 현재 폭발 흔적이 1073∼74년의 폭발로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사’와 ‘증보문헌비고’ 등의 관측기록 및 현대 천문학이론 검증을 통해 밝혀냈다.

이 논문은 세계 4대 천문학 저널인 ‘유럽 천문학 및 천체물리학’에 표지 논문으로 게재됐고 이 공로로 양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의 제16회 과학기술우수논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천문연구원은 천문법의 제정과 천문역법국가참조표준센터 설립을 추진 중이다. 달력을 만드는 법적 근거가 없고 공신력이 없는 역법이 적지 않아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 대덕연구단지 내의 연구소와 벤처기업에 관련된 것으로 소개할 만한 내용이 있거나 이 시리즈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동아닷컴 대전지역 전용 사이트(www.donga.com/news/daejeon)에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기사도 모두 이곳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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