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쉿! 우리아들은 중…위…권

  • 입력 2008년 9월 9일 02시 56분


《오전 6시 반 기상.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학교 수업. 오후 10시에 끝나는 야간자율학습과 밤 12시까지 계속되는 학원 강의. 귀가 후 한 시간 남짓한 인터넷 강의까지…. 영문학도를 꿈꾸는 고교 2학년생 서모(17·경기 수원시 권선구) 양의 하루다. 수학 과외와 토플 학원 수강까지 서 양의 빡빡한 일과는 주말에도 계속된다. 어른도 힘에 부칠 살인적인 일과를 오늘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서 양의 성적은 내신 기준으로 반(38명)에서 10∼15등 수준. 내년 대입에서 서울 소재 대학 입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서 양의 하루는 대한민국 수십 만 ‘중위권’ 학생의 일상이다.》

○ 살리에르의 눈물

서 양의 책상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상위권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의 공부법을 소개한 신문기사가 빼곡히 붙여져 있다. 서 양도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갔으면’ 하는 마음에 서 양의 어머니가 참고하라며 신문에서 오려준 것.

물론 이런 공부법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투리 시간에 영어단어를 외우고 쉬는 시간 10분 동안 전 시간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등 상위권 학생들의 이런저런 공부법을 따라해 봤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다.

가장 속이 상하는 사람은 당연히 서 양 자신이다. 서 양은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상위권 애들만큼 안 되니까 ‘꿀리는’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성적표를 받은 날 방문을 걸어 잠그고 펑펑 운 적도 많다.

“성적이 좋지 않다는 사실보다 노력만큼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슬프다”는 서 양의 얘기다. 대한민국 중위권 학생들의 눈물은 아무리 노력해도 모차르트의 재능을 넘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자책하며 지새운 밤이 많았다는 작곡가 살리에르의 그것과 닮았다.

다가오는 추석 연휴도 반갑지 않다. 평소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공부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완벽한 아이를 일컫는 말)’와의 비교도 모자라 친척들의 ‘공부 청문회’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 “사촌 누구누구는 전교 몇 등인데 너는 몇 등이니? 무슨 대학 갈 거니?” 등 쉴 새 없는 질문 공세는 이들을 한없이 불편하게 만든다.

고등학교 2학년 장모(17·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군은 “자격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질문 속에 ‘너는 왜 그것밖에 못 하냐’는 의미가 담긴 것 같아 속이 많이 상한다”고 말했다. 장 군은 올해 추석에는 차례에만 참석하고 모의고사를 핑계로 인근 도서관으로 향할 작정이다.

눈높이를 낮추는 것도 쉽지 않다. 내신 기준으로 반에서 10등 정도 하는 고교 2학년생 송 모(17·서울시 강동구 명일동) 군은 얼마 전 부모님께 “목표 대학을 낮추고 싶다”고 했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부모님이 “목표에 맞춰 성적을 올릴 생각은 안하고 현실에 안주하려 든다”며 “그런 생각할 시간 있으면 한 자라도 공부를 더 하라”며 꾸중을 한 것. 송 군은 “원칙적으로야 부모님 말씀이 맞지만, 대입 수시모집이 1년도 안 남은 상황에서 이루기 힘든 목표에 집착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 더 초조하고 집중도 잘 안 된다”고 말했다.

○ “중위권을 중위권이라 부르지 못하고”

중위권 스트레스는 부모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반에서 15등 내외인 고등학교 2학년 자녀를 둔 임모(45·여·서울 서초구 서초동) 씨는 6월에 참석했던 한 사설 학원 주최 입시설명회에서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설명회 내용이 서울지역 상위권 대학 위주여서 자녀 성적에 맞는 다른 대학의 입시정보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강사나 다른 학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에 설명회 내내 조용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 씨는 “정작 궁금한 대학 이름을 꺼내면 사람들이 ‘성적도 안 되면서 남의 질문시간만 빼앗는다’고 생각할까 봐 내 아이와 상관도 없는 최상위권 대학의 입시정보만 듣다 왔다”며 한숨을 쉬었다.

실제로 대다수 엄마들에게 ‘중위권’이라는 용어는 금기어가 된 지 오래다. 학습컨설팅 전문 TMD교육그룹의 오혜정 컨설턴트는 “자녀의 학습능력을 진단해 개선책을 찾기 위한 학습컨설팅 시간조차 ‘중상위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예전엔 잘했는데 요즘은 떨어졌다’는 식으로 자녀의 정확한 성적 공개를 꺼리는 엄마들이 대다수다”고 말한다.

임 씨는 “나중에 진짜 성적이 밝혀질지언정 일단 상위권이나 중상위권이라고 해둬야 학원 강사도 공부 잘하는 애들과 똑같이 대해주지 않을까 싶어 아이의 성적을 정확히 말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부모들의 스트레스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죽어라 공부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녀가 잠깐 인터넷을 하거나 TV를 보는 모습만 보이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윤모(43·여·서울 마포구 상암동) 씨는 “안 그래도 지쳐있을 아이에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왜 못하나’ 하는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자꾸 닦달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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