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문학숲 논술꽃]교육의 참의미는 무얼까

  • 입력 2008년 7월 21일 02시 51분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명마는 항상 있으나, 그 말을 알아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교육(敎育)이란 한자는 맹자의 ‘득천하영재이교육지(得天下英才而敎育之·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뜻으로 보면 ‘교(敎)’는 ‘매를 가지고 아이를 길들이다’라는 뜻이고, ‘육(育)’은 ‘갓 태어난 아이를 살찌게 한다’로, ‘기른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사회화, 지적 성숙, 인격 형성 등 다양한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 교육은 지적 성취에만 치중하여 동일한 잣대로 인간을 평가하려 한다.

『말(馬)은 발굽으로 서리와 눈을 밟으며 돌아다닐 수 있고 털로 바람과 한기를 막아 명(命)을 보전할 수 있으며,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언덕 위로 힘차게 내달린다. 이것이 말의 참된 본성이다. 따라서 말에게는 크고 화려한 궁전이 있어도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백락(伯樂)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나는 말을 잘 다룬다”고 하면서 말의 털을 태우기도 하고 깎아 내기도 하면서 고르고, 달군 인두로 낙인을 찍고, 머리에는 굴레를 씌우고 발에는 밧줄을 매어 마구간에 몰아넣거나 말뚝에 매거나 하여 조(組)를 갈라놓았다. 그리하여 죽은 말이 열 가운데 두셋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굶주리게도 하고 목마르게도 하며, 빠른 걸음으로 걷게도 하고 빨리 내닫게도 하며, 보폭을 똑같게 하고 열(列)을 맞추게 했다. 말은 앞쪽에서는 재갈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고, 뒤쪽에서는 채찍이나 회초리로 위협을 당했다. 그래서죽은 말이 이미 반을 넘었다.

[장자(莊子), ‘마제(馬蹄)’]』

사람은 모두 타고난 모습이 다르고 타고난 재능이 다르다. 장자의 견해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타고난 본성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러한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기보다 획일화된 잣대 속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것을 배우도록 한다.

장자는 말의 본성은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봤다. 그러므로 마구간에 말을 몰아넣고, 머리에 굴레를 씌우고, 털을 깎는 행위는 모두 말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인 셈이다. 인간은 천리마를 만들기 위해 채찍이나 회초리로 위협해 말을 훈련시킨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훈련이 말의 본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죽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내가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무의 천성(天性)을 따라 그 본성(本性)을 잘 펼 수 있도록 할 뿐입니다. 나무의 본성을 본다면, 심을 때는 그 뿌리를 펴주기를 바라고, 북돋기를 할 때는 고르게 하기를 바라며, 흙을 채울 때는 본래 것을 좋아하고, 다지기를 할 때는 단단하게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해 놓은 다음에는 흔들어 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며 내버려두고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묘목을 심을 때는 자식을 돌보듯 하고 버려둘 때는 내버린 듯이 하면 그 천성이 온전해지고 본성은 다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고 그것을 잘 자라고 무성하게 할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 열매 맺기를 억제하고 억누르지만 않을 뿐이지 그것을 일찍 익게 하거나 번성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무를 심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뿌리는 겹쳐 심고 흙은 바꾸어주며, 북돋기를 할 때는 너무 많이 하지 않으면 모자라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사랑하고 염려하기를 지나치게 한 나머지 아침에 와서 살피고 저녁에 어루만지며 돌아갔다가는 다시 와서 살피곤 합니다. 심한 자는 그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서 나무가 말라죽지나 않았는지 시험해 보고, 그 뿌리를 흔들어 나무가 엉성하게 심어지지나 않았나 시험해 보니 나무의 본성이 날로 어긋나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그것을 해롭게 하고, 염려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원수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저들이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유자후, ‘종수곽탁타전’]』

오늘날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 제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입시 위주의 획일화된 잣대로 평가하고 있다. 백락이 뛰어난 말을 만들어내기 위해 반 이상을 죽이는 것처럼 자신의 본성을 살리지 못하고 타고난 재능을 썩히는 학생도 많다.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도 나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오로지 인간의 관점에서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나무가 잘 자랄지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오히려 나무의 성장에 방해를 준다. 나무의 본성을 살피고 그 본성이 잘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곽탁타의 자세는 참된 교육의 방향을 알려준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명마는 항상 있으나, 그 말을 알아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천 리를 달리는 말은 한 끼에 곡식 한 섬을 먹어치우는데, 말을 기르는 사람이 그 능력을 모르면 먹이를 배불리 먹이지 않는다. 천리마는 기운이 날 수 없으며, 그 재주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오히려 보통 말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

말을 채찍질하여 부릴 때에는 거기에 알맞은 방법을 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말을 기를 때에는 충분히 먹이를 주어 재능을 남김없이 드러내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며, 말이 자기의 고통을 울음으로 호소해도 그 뜻을 알아주지 못한다. 그러고도 채찍을 손에 들고 말하기를, 천하에 좋은 말이 없다고 한다.

[‘잡설(雜說)’]』

정말 좋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말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천리마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을 잘 파악하고 그러한 본성이 잘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여건이 없기 때문에 인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을 알아주고 그 능력을 믿고 키워줄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교사가 경사(經師)가 되느냐 人師(인사)가 되느냐 하는 것은 교사 자신이 결정할 문제다. 그가 교육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견해 여하에 따라 經師가 될 수도 있고 人師도 될 수 있다. 만일 글을 가르치는 것을 교사의 임무로 생각한다면, 그는 經師가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람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는 人師가 될 것이다. 칸트가 말했듯이 ‘사람은 오직 교육을 통하여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믿는다면, 교사는 經師가 됨으로써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오천석, ‘스승’]』

이러한 측면에서 경사(經師·경문을 읽거나 외는 법사)와 인사(人師·덕행을 갖춰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사람)를 구분하고 있는 오천석의 ‘스승’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김은정 ㈜엘림에듀 대표 집필위원 엘림에듀 대치 직영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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