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여론광장/이민사박물관… 660만 교민 묶는 끈 되길

  • 입력 2008년 5월 30일 06시 59분


6월 13일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인천 월미도에서 문을 연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서럽고 가슴 저린 일을 꼽는다면 초기 하와이 이민과 독일 광원, 간호사의 취업이민에 서린 애환일 것이다.

대한제국이 쇠망해 가던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121명이 하와이 이민선에 몸을 싣고 첫 이민 길에 올랐다.

굶주림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에 출항의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 이민선에 오른 사람이나 송별하러 나온 친지들이 너나없이 곡성을 울렸다고 한다.

이민자들은 일본에서 ‘갤릭’호로 갈아타고 1903년 1월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 하와이에 도착했다.

갤릭호에서 내린 이민 1세대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어렵사리 하와이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1905년 인천항에서 1033명이 영국 선적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로 떠났다.

이들은 유카탄 주의 25개 농장에 흩어져 4년간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고 대부분이 계약기간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만리타향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하와이 이민 1세대의 나라 사랑은 독립운동으로 나타났다.

나라를 잃은 이후 완전히 버림받은 교민이 된 이민자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조국 독립을 위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자금을 보냈다.

광복이 되자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민의 출발지요, 고향인 인천에 대학을 세운 일이다.

날품팔이와 중노동으로 모은 수십만 달러의 거액은 사학의 명문 인하공과대 건립 기반이 되었다. 학교명 인하(仁荷)는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가슴 아픈 우리나라의 이민 역사는 경제개발의 불씨를 지피던 1960년대로 이어진다.

1963년 광원 500명, 1966년 간호사 128명이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들이 힘겨운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을 조국에 송금한 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국민총생산량의 2%에 달했다고 한다.

인천의 한국이민사박물관 건립사업은 대한제국 때 인천항을 떠나 미지의 낯선 땅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오늘의 교민사회를 이룩한 이민자들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해외 이민의 출발지였던 인천에 세워지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전 세계 660만 교민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한민족 네트워크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연어가 수없이 많은 난관을 뚫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 알을 낳듯, 한국이민사박물관 개관을 통해 그들이 몇 세대를 걸쳐 낯선 땅에서 고생하며 이룬 부를 고국에 투자할 것으로 기대한다.김진택 인천시 공보관 kjt3416@hanmai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