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블루칼라]“우리 남편요? 정년 채우는 생산직이에요”

  • 입력 2007년 3월 2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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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기준으로 하면 공고를 졸업한 생산파트 직원의 여건이 훨씬 낫죠. 대학생 자녀 학자금 지원도 못 받고 퇴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P(44) 씨는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큰딸을 볼 때마다 걱정이 된다.

딸아이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이면 퇴직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포스코는 직원 복지사업으로 대학생 자녀 2명까지 학비를 지원한다.》

○ “정년 채우는 블루칼라가 부럽다”

공고를 졸업하고 19세에 포항제철소에 현장 기술자로 입사해 29년째 근무하는 H(48) 씨. 26세에 결혼한 그는 대학에 다니는 자녀 둘의 등록금을 회사의 학자금 지원으로 해결하고 있다.

H 씨는 “연봉이 많고 4조 3교대의 근무조 편성에 따라 하루 근무하고 평일 이틀을 쉴 수도 있어 정년까지 일할 생각”이라며 “입사 때는 고졸과 대졸의 연봉 차이에 자격지심도 들었지만 10년 정도 근속한 뒤부터는 ‘내가 회사의 중요한 직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포스코의 정년은 56세. 사무직의 경우 승진 문턱에 걸려 정년을 채우는 경우가 드물다.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자동으로’ 퇴직하는 게 관례다.

입사 17년차인 사무직 P 씨는 “같은 나이의 고졸 생산파트 직원과 비교하면 근속연수가 8년가량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9000여 명이 근무하는 포항제철소의 경우 기술자로 생산파트에서 일하는 고졸 사원들은 사규대로 정년을 거의 다 채운다. 포스코의 임금체계는 단일호봉제여서 사무파트와 생산파트의 구분이 없고 직급에 따른 수당 차이 정도가 있을 뿐이다.

내년이면 입사 20년차인 현대중공업 생산직 L(45) 씨는 울산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입사했다. 그는 3년 전 골프를 시작했다.

“골프 비용이 만만찮지만 내 연봉(6000만 원 안팎)으로 눈치 보지 않고 즐길 정도는 됩니다. 예전에는 모임이 있을 때면 작업복 대신 평상복을 갈아입고 나갔지만 지금은 회사 이름이 적힌 잠바를 자랑스럽게 입고 돌아다니죠.”

○ “내가 조기 퇴직하는 대신 우리 아들을…”

대기업 생산직의 고용이 안정되다 보니 자식에게 대를 물리고 싶어 하는 ‘로열 블루칼라’도 늘어난다.

울산석유화학공단 내 모 대기업 인사 담당 중역은 최근 정년이 2년여 남은 생산직 직원에게서 자신이 조기 퇴직하는 조건으로 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못하고 있는 아들(28)을 생산직으로 채용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인사 규정상 불가능하다”며 거절했지만 생산직 직원들의 ‘자녀 채용 요구’가 요즘 부쩍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이 중역의 전언이다.

2004년 임금협상을 앞두고 현대자동차의 일부 조합원도 ‘자녀 채용’의 명문화를 협상 요구안에 포함시키자고 했지만 노조 집행부가 “지금도 고임금을 받는다는 지적이 있는데 자녀 채용까지 요구하면 비난이 쏟아진다”며 거부했다.

현대중공업은 2004년 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에서 ‘임금 피크제’와 ‘직원 자녀 채용 노력’ 조항을 맞바꿔 신설하자고 노조에 제시했다. 노조는 거부했지만 정년을 앞둔 노조원들에게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현 시점에서 로열 블루칼라의 대표 격인 ‘대기업 생산직’.

그러나 이것도 ‘반짝 현상’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기업의 지불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노조의 힘으로 매년 임금을 인상하는 것으로 고임금을 유지하면 궁극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로열 블루칼라와 블루칼라 간의 빈익빈 부익부 갈등도 무시 못 할 불안요소다.

여수산업단지 모 중소업체 생산직 직원인 C(40) 씨는 “연봉이 단지 안의 대기업체 생산직 직원의 60∼70%밖에 안 돼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며 “같은 생산직 근로자지만 누구는 평일에 골프채 메고 나가고 누구는 해외여행 한 번 가 보지 못한 현실이 서글프다”고 말했다.

울산대 사회과학부 조형제 교수는 “한때 전성기를 구가하다 몰락한 산업도시인 영국의 글래스고나 미국의 디트로이트를 택할 것인가, 지속적인 번영을 구가하는 일본 도요타나 독일 볼프스부르크를 택할 것인가는 노사와 지역주민들이 얼마나 협력관계를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여수=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포항=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울산=정재락 기자 ra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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