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까지 교수까지 ‘베껴’ 열풍…일상화된 표절문화

  • 입력 2007년 2월 20일 16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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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 사이에는 인터넷에서 과제물은 물론 일기 내용까지 그대로 베껴 쓰는 현상이 심해 어려서부터 표절 불감증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초등학생이 인터넷을 베끼는 것을 연출한 장면.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초등학생들 사이에는 인터넷에서 과제물은 물론 일기 내용까지 그대로 베껴 쓰는 현상이 심해 어려서부터 표절 불감증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초등학생이 인터넷을 베끼는 것을 연출한 장면.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월 15일 맑음, 동생과 함께 비누방울 놀이를 하였다. 그런데 그만 동생이 비누방울을 엎질러서 할 수 없이 내가 비눗물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경기 수원시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박모(27) 씨는 2월 초 학생들의 겨울방학 일기장을 검사하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 같이 쓴 학생 4명을 찾아냈다. 이들은 어린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있는 일기 예시문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밝혀졌다.

박 씨는 "일기뿐만 아니라 독후감, 박물관 견학 등 방학 숙제를 인터넷에서 퍼 온 아이들이 수두룩하다"며 "남의 것을 베끼는 일이 잘못이라는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점이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최근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 마광수 연세대 교수, 이필상 고려대 총장 등의 표절 논란이 잇달아 불거지면서 초등학생부터 대학 교수까지 표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표절 한국'의 풍토에 대한 자성이 일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베껴' 열풍='일기거리와 일기내용 좀 부탁 ㅠㅠ', '아낌없이 주는 나무 독후감 좀 써주세요. 내공 60점 드림', …

이는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오른 질문(?)들이다. 답변란에는 출처 불명의 정보와 글, 기사가 줄줄이 올라와 있고 심지어 '내공' 점수를 얻기 위해 독후감이나 일기를 써서 올린 누리꾼도 있다.

'정보통신(IT) 강국' 한국에선 미니 홈피(홈페이지)와 블로그 열풍을 타고 표절에 대한 범죄 의식이 더욱 흐려지고 있다. 검색어만 입력하면 쏟아지는 이미지와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퍼서 나르는 것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의 글을 마치 자신이 쓴 것처럼 미니홈피로 가져가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표절은 범죄'라는 인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직장인 한모(30) 씨는 "미니 홈피에 출처를 안 밝히는 이유는 단지 귀찮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초등학생은 물론 직장인도 지금까지 가시적인 성과 위주의 문화에서 표절 관련 교육을 단 한번도 받지 못해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일부 부모들은 초중고교생 자녀의 수행평가 과제를 대신해 주는 등 자녀들에게 표절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학부모 김모(42·여) 씨는 "숙제는 아이 스스로 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내신 성적을 위해 내가 도와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면서 "부모들끼리 모여 숙제를 대신 해줘야 하는 신세를 한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상아탑도 '표절의 온상'=대학가에선 '해피OOO', '레포트OO' 등 과제물 사고팔기 사이트가 성행하고 인터넷 정보를 짜깁기한 보고서가 넘쳐나고 있다. 어떤 학교 학생이 같은 자료를 내려받았는지를 알려줘 같은 보고서를 한 교수에게 내지 못하도록 하는 '친절한' 사이트도 있다.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에는 지난 학기 수강생의 과제물이 넘쳐나 누구든 가입만 하면 내려받을 수 있다.

서울 K대의 이모(25·신문방송학과) 군은 "한 보고서를 사서 서론만 바꿔 과제로 낸 뒤 다시 사이트에 올렸더니 10여 명의 학생이 이 보고서를 내려받았다"고 말했다.

학생들뿐만 아니다. 공모전에 응모할 작품을 과제로 내주는 방식으로 학생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교수도 있는 등 교수들도 표절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서울대 김명환(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외국 대학은 홈페이지에 주요 표절 사례를 자세히 소개하는 반면 한국은 표절의 기준과 정의, 처벌 규정이 없는 대학이 많다"며 "교수도 표절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해 제자들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표절 교육을 하자=고려대 한국정보통신대 등 일부 대학은 자체 검색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표절과의 전쟁에 나섰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이다. 학생의 과제물 양이 많고 표절 경로가 다양해 실제 적발 사례는 많지 않다.

4년 전 표절적발 프로그램을 개발한 부산대 조환규(정보컴퓨터공학부) 교수는 "과제물의 70%는 인터넷 정보, 30%는 리포트 판매 사이트를 참고해 작성되고 있다"면서 "학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표절을 가려내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적발되더라도 해당 보고서만 0점 처리하거나 해당 과목에 낙제점을 주는 등 처벌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이 때문에 교육 당국이나 학교가 표절에 대한 자세한 규정을 만들고 예방 차원에서 표절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초중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범대와 교육대에 표절 관련 강의를 도입해 학생들에게 어릴 적부터 표절은 범죄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10여 년간 표절을 연구한 세명대 김기태(미디어창작과) 교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풍토가 심어져야 한다"며 "아이들이 지식을 창조한 사람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 교사들에게도 표절 관련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인철 기자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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