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한국’ 이젠 바로잡자]<1>따옴표 안쓰면 원전 밝혀도 표절

  • 입력 2007년 2월 2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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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연구 분야의 권위자로 유명한 미국 시카고대의 찰스 립슨 교수가 자신이 쓴 ‘대학에서 정직하게 글쓰기’ 책자를 보여주며 표절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시카고=김승련 특파원
표절 연구 분야의 권위자로 유명한 미국 시카고대의 찰스 립슨 교수가 자신이 쓴 ‘대학에서 정직하게 글쓰기’ 책자를 보여주며 표절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시카고=김승련 특파원
시카고대는 미국에서 대학의 표절 방지 노력을 거론할 때 첫손에 꼽힌다. 이미 100년 전에 발간한 ‘시카고 작문 교본(Chicago Manual of Style)’이 훌륭한 표절 방지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양심 지키기’의 전도사로 통하는 이 대학 정치학과 찰스 립슨 교수의 활동이 주목 받고 있기 때문이다.

립슨 교수가 2004년 출간한 ‘대학에서 정직하게 글쓰기(Doing Honest Work in College)’는 이 대학 신입생이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

그가 말하는 반칙 없는 글쓰기의 핵심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달 31일 시카고의 립슨 교수 자택을 찾았다.

립슨 교수는 무엇보다 교수의 책임을 강조하며 “학생들이 잘 몰라서 표절하는 일이 없도록 교수들이 앞장서 충실히 도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교수는 학생의 잘못을 찾아내는 심판관이 아니라, 학생들의 앞길을 도와주는 친절한 ‘코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하루 전 캐나다 서스캐처원 주의 한 대학에서 ‘표절 방지’ 워크숍을 하고 귀가했다. 캐나다의 대학은 세계 최고 수준의 표절 방지 교육을 자랑하고 있지만 이런 학교도 1주일 간 표절을 경계하는 워크숍까지 열 정도로 끊임없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표절 방지에는 ‘왕도(王道)’가 없어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내 생각을 나의 언어에 담아 논문을 작성했다는 말이 진실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을 가져왔다면 떳떳이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이왕 글을 쓰려면 규칙대로 정확히 하자는 것이죠. 기본을 지키면 표절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정치경제학 학자인 그가 연구 시간을 쪼개 가며 표절 방지를 위해 뛰는 까닭은 제자들 때문이다.

“몇 년 전 학부생의 졸업논문을 지도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성적 우수자만 제출 자격이 주어지는 논문인데도 인용법을 제대로 지키는 학생이 드물었고, 본의 아니게 표절로 오해받을 일을 하는 사례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공정한 원칙을 가르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립슨 교수는 “남이 만들어 놓은 좋은 결과를 가로채고,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정직한 경쟁자가 손해를 본다는 점에서 표절은 범죄의 일종”이라고 강조했다.

표절 방지 교육이 비교적 철저한 미국에서조차 표절이 일어나고 있다. 인터넷 시대는 ‘복사해 붙여 버리면(copy and paste)’ 남의 글이 순식간에 나의 것으로 바뀌는 편리함을 가져왔다. 표절이 이렇게까지 쉽고, 죄의식이 옅어진 때도 드물다.

그는 표절이 늘어나는 진짜 이유로 ‘좋은 학점=좋은 대학원 진학=고소득 직업’이란 공식이 팽배한 현실을 꼽았다. ‘성공’에 이르는 문이 갈수록 좁아지다 보니 어린 학생들이 ‘반칙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표절의 유혹에 빠지는 일을 막기 위해 시카고대 경영대학원은 2002년 ‘명예 조항(Honor Code)’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회계부정 사건인 엔론 사태가 불거진 직후였다.

경영대학원생들은 모든 과제물 및 재택(在宅) 기말시험지에 ‘절대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문구를 첫머리에 적고 서명해야 한다.

경영대학원 2학년생 홍준화 씨는 “이 문구가 주는 부담 때문인지 미국 학생들은 경영 사례집에서 모범답안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서 “명예 조항을 적으며 남의 답을 넘보지 않겠다는 자존심도 강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학자의 길을 간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도 자신이 직접 땀을 흘려 찾아야 한다는 게 이 대학 학생들의 불문율이다.

시카고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4년차인 로린 골드먼 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25쪽 분량의 글을 위해 100편가량의 학술논문을 읽었고, 글쓰기 규칙을 제대로 지켰는지를 거듭 확인하는 데 논문작성 시간의 5∼10%를 할애했다”고 말했다.

시카고대라고 표절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 대학에서도 1990년대 중반 제자가 쓴 서평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줄리어스 커시너(역사학) 교수가 적발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내 생각과 동일한 내용이 담긴 만큼 나의 것으로 생각했다”고 해명했지만 결국 5년 동안 대학원 강의를 할 수 없는 중징계를 받았다.

립슨 교수는 “표절을 막으려면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하고 엄격히 검증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시카고대 김영기(입자물리학) 교수도 “교수가 평소 함께 실험하고 연구하면서 엄격한 원칙을 지키는 것을 보여주면 학생들은 몸으로 반(反)표절 의식을 갖게 된다”며 교수의 책임을 강조했다.



▼감상문 쓰게 하고… 수업중 발표시키고…▼

美 대학교수들 ‘학생들 인터넷 표절 막기’ 아이디어

요즘은 클릭 몇 번으로 논문을 쓸 수 있는 ‘인터넷 표절시대’다. 학생들의 표절 수법이 갈수록 지능적이고, 표절이 그 어느 때보다 쉬워지자 미국의 대학교수들은 서로 학생들의 표절 방지법을 공유하며 대처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 뱅가드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전업 작가로 나선 로버트 해리스 씨는 ‘가상의 소금(Virtual Salt)’이란 자신의 블로그에서 학생들의 표절을 방지하고 학문의 정직성을 유지하기 위한 교수들의 대처법을 소개했다.

▽논문 마감을 2∼4주 앞당겨라=학생들이 학기 말에 2, 3개 과목의 시험을 치르고 숙제를 내려면 표절 유혹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논문 등 과제의 마감 시한을 기말시험 기간보다 일찌감치 앞서 정하면 마감에 따른 학생의 부담이 덜어지고 ‘우발적 반칙’의 가능성도 줄일 수 있다.

▽감상문을 쓰게 하라=기말시험을 대체하는 과제물을 마감 당일에 제출받으면서 간단한 글쓰기를 시켜 보는 것이 좋다. ‘이번 논문에서 내가 배운 것’이란 평범한 주제도 좋다. 학생들이 감추기 어려운 진짜 글 솜씨를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긁어다 모아 놓은 논문의 글 솜씨와도 비교할 수 있고, 숙제 과정에서 자료를 실제 읽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계획을 학생들에게 미리 알리라.

▽구두(口頭) 발표를 활용하라=논문은 인터넷에서 복사해 써올 수도 있지만 수업 중 발표 내용은 자신이 공부하지 않으면 베낄 수 없기 때문이다.

▽논문을 중간 점검하라=숙제를 학기 말에 ‘딱 한 번’만 제출하도록 하지 말라. 학생들이 과제를 미루다가 ‘논문 표절’을 선택할 수도 있다. 틈틈이 1차 원고, 2차 원고를 교수에게 가져오도록 하라.

▽좋은 인용법을 가르치라=다른 사람의 논문을 정확하게 인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용을 잘하면 자기 글의 논지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표절이 의심되는 과제물은 표절 검색 전용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꼭 확인해 보라. 귀찮더라도 결국은 교수가 표절 방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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