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지혜의 숲]정의와 증명

  • 입력 2006년 12월 19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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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동일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 ‘정의’라면 각 사물 사이의 내적 관계법칙을 보여주는 것이 ‘증명’이다》

철학자 중에는 수많은 천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천재라 하면 역시 파스칼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천재성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지방 세무 장관이라는 고위직을 내던지고 아들의 교육에만 전념했을 정도였다.

파스칼의 아버지는 상당한 수준의 기하학자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공부하는 것을 본 어린 파스칼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들이 거기에 몰두할 것을 뻔히 예견한 아버지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공부를 마치면 가르쳐 주겠노라며 자꾸 감추었다. 파스칼이 열두 살이던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이 방 한구석에서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궁금해서 가보았더니, 아들이 자기 나름대로 용어를 정의하고는(가령 선분은 ‘막대기’, 원은 ‘동그라미’라는 식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32번째 정리까지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놀란 아버지는 바로 동료 기하학자의 사무실로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버지의 감격에 재를 뿌리거나 아들의 천재성에 토를 달자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아버지가 감추려 했어도 어린 파스칼은 적어도 ‘증명’이 무엇이고 ‘정의’는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랬으니까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거기서 나오는 도형들의 성질로부터 여러 정리들을 이끌어내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린 천재와 ‘정의’ 자체, 혹은 ‘증명’ 자체를 발명해낸 사람을 비교한다면, 누가 더 머리를 많이 쓴 셈이 될까?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이다.

소크라테스의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확립된 ‘정의’의 방법은 사물의 내포를 정하고 각 사물에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물 자체의 본성, 즉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주는 행위이다.

지능이 낮을수록 분별력이 없고, 분별력이 떨어질수록 모든 것을 두루뭉술하게 뒤섞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사물을 명확히 구별하는 지성의 능력을 최고도로 밀고 갔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이 모두 실패로 끝나는 것은 정의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정의는 낱말의 뜻과는 다르며 허구를 다루지 않는다. 가령 ‘용(龍)’이라는 낱말에 대해 뜻은 이야기할 수가 있지만, 그것을 정의내릴 수는 없다. 존재 자체가 허구적이기 때문에 경계를 확정지을 수 없고 사람마다 정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접하는 사물은 모두 운동 속에 있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각 사물의 경계가 지어져서 모두 엉켜 있기 때문에 뭐가 뭔지 구별하기 힘들다. 그런 엉킴을 풀면 그 속에 있는 것들이 풀어헤쳐져 나온다. 그것을 ‘분석(analysis)’이라 하는데, ‘묶인 것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ana-) 풀어준다(lysis)’는 뜻이다.

그렇게 풀어헤쳐진 것 하나하나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 ‘정의’라면, 그런 각 사물 사이의 내적 관계법칙을 보여주는 것을 ‘증명’이라 한다. 증명이란 말의 그리스어 ‘apodeiksis’는 ‘밖으로(apo-) 드러내 보인다(deiknumi)’는 뜻이다. 사물 속에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것, 즉 사물들 사이의 내적 연관과 관계법칙을 밖으로 펼쳐내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정의’와 ‘증명’은 소크라테스와 기하학이 확립한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이후 증명의 방법은 논증, 실증, 실험, 조작 등으로 발전해 나간다. 그 양자는 허구적이지 않는 실재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것의 관계법칙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이후 모든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는다. 학문의 내용이 바뀌거나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고 거대한 패러다임들이 바뀌더라도 정의나 증명 같은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바뀌어 버리면 학문이 더는 학문이 아닌 것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였던 그 의미를 잊어버린 듯한 철학들이 참으로 많다.

최화 경희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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