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 입력 2006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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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은 이제 한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은 언제라도 눈을 흩뿌릴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고요, 나무들은 어느새 맨몸을 드러내었습니다. 오로지 우리 인간만이 속살이 드러날까 꼭꼭 싸매고 살아가고 있네요. 아마 이 추운 겨울을 잘 살아나가기 위해서겠지요? 삶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겹겹의 옷으로 몸을 감싸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겹으로 자신을 싸매고 있나요?

그런데 여기 생(生)의 한가운데 서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여자, ‘니나’가 있습니다. 그녀를 통해 자신이 싸맨 한 올 한 올의 정체가 무엇이고, 삶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지 비추어 보기 바랍니다.

‘생의 한가운데’는 독일 여류 작가 루이제 린저가 쓴 명작입니다. 1950년에 발표된 소설인데요. 편지와 일기 형식 그리고 등장인물 간의 짧은 대화가 오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니나와 그녀를 사랑한 의사 슈타인 박사로서 두 사람은 서로가 지니고 있는 열정을 매우 다르게 표현하며 삽니다. 니나는 모든 것을 생,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매 순간 숨 가쁜 정열로 극적인 나날을 엮어나가는 인물이고, 슈타인 박사는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18년 동안이나 오로지 니나만을 바라보며 그녀의 삶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인물입니다.

여러분은 두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니나처럼 끓어오르는 열정을 표현하며 살고 있나요, 아니면 슈타인 박사처럼 자신의 열정을 고요하게 가슴에 잠근 채 살아가고 있나요? 여기서 잠깐 니나가 ‘생이란 무엇인지’를 깨닫는 한 장면을 살펴보기로 해요.

나는 할머니를 보고 생각했어요. 생이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하고. 나는 아주 옛날 사진을 발견하고 할머니가 언젠가 한때는 예쁜 소녀였고 아름다운 신부였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늙고 무섭게 추악해지고 냄새를 피우면서 앉아 있었어요. 할머니는 거의 살아 있지 않았고, 완전히 고독했어요. (중략) 나는 할머니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생전 처음으로 느꼈어요. 우리가 정신 속에서 우리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끔찍한 것에 불과하다고. 왜냐하면 할머니는 여기 앉아 있었으나 그것은 예외적인 케이스가 아니었고 할머니의 파멸은 할머니 혼자의 파멸이 아니었어요.

니나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그러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일을 순전하게 받아들입니다. 집안이 어려워지자,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조건으로 자신을 보살펴 달라는 먼 친척 노인의 청을 두려움 없이 수락합니다. 처음에는 힘들어했으나 니나는 곧 그 삶의 현실에 적응을 했고,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삶의 비참함을 깨달으며 정신적으로 성숙해집니다. 그런데 생이란 정말 니나가 깨달은 것처럼 끔찍하기만 할까요? 그리고 맨 마지막에서 토로한 ‘할머니의 파멸은 할머니 혼자의 파멸이 아니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참으로 아리송한 깨달음이네요. ‘생의 한가운데’를 헤매며 여러분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자, 그럼 이제 그녀를 사랑한 슈타인 박사를 만나볼까요?

나는 고향에 돌아왔고 땅은 나를 다시 받아들였다. 니나는 손을 얼음같이 찬 시냇물 속에 담그고 물을 떠서 마시기를 즐겨 했다. 나도 니나의 흉내를 냈다. 이 물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는 것일까? 아, 이것에서는 생의 냄새가, 오랫동안 내가 맛보지 못했던 생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슈타인 박사가 대하는 ‘생’은 니나를 바라볼 때, 니나와 함께 있을 때만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도 느낄 수 있나요? 니나가 손을 담근 시냇물에서 생의 냄새를 맡는 슈타인 박사의 마음을요. 슈타인 박사가 남다른 감성을 지닌 소유자여서라기보다는 불현듯 찾아온 사랑에 자신의 온 생을 걸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자신의 생을 걸 수 있을까요? 과연 그런 대상을 만날 수 있을까요?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여러분은 슈타인 박사가 될 수 있을까요? 생은 참 까다롭기만 한 듯합니다. 아마도 이 소설이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렇듯 우리에게 ‘생’에 대한 까다롭지만 피할 수 없는 고민을 선사하기 때문일 거예요. 힘들어도 자기를 바라보는 일이니 지긋하게 참아보기를 권합니다.

이 소설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인물이 또 한 명 있습니다. 우리에게 두 사람의 삶을 풀어내 놓는 서술자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요, 바로 니나의 언니입니다. 그녀의 독백을 통해 또 한번 까다로운 ‘생’을 살펴보도록 해요.

나는 내가 슈타인의 이미 시효가 지난 고통이나 니나의 자살적인 작별에 대해서만 우는 것이 아니고 내 생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 또 마치 젖은 잿빛의 촘촘한 그물과 같이 얽힌 나 자신에 대해서, 또 마치 젖은 잿빛의 촘촘한 그물과 같이 얽힌 나 자신과 모든 인간의 숙명에 대해서 울었다. 누가 과연 이 그물을 찢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비록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그물은 여전히 발에 걸려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끌고 다닐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보기에는 아무리 얇은 것 같아 보여도 감당하기가 어려운 무거운 짐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인생은 아름답다, 인생을 충만하게 즐기자꾸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니나나 그의 언니가 깨달은 ‘생의 모습’은 운명처럼 딱딱하지요. 하지만 잘 뒤집어보면요, 색다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발에 걸려 있는 그물 같고,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 같은 우리의 숙명이 어쩌면 아슬아슬한 삶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거든요.

숙명을 타고 흐르는 여인, 니나.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맨몸으로 서 있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생’을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승은 학림 필로소피 논술 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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