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입센의 ‘인형의 집’

  • 입력 2006년 11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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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까? 여러분은 진정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인가요? 여러분이 이번에 만나게 될 인물은, 자신의 참된 삶을 찾기 위해 문을 박차고 나선 ‘노라’라는 여성입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이며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온 노라가 진정한 ‘노라’를 찾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요, 엄마이면서 아내인 노라는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요? 왜 노라는 문을 박차고 나가야만 했을까요?

‘인형의 집’은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이 지은 희곡입니다. ‘햄릿’과 형태가 같은 문학 작품인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 무대에서 선을 보였습니다. ‘인형의 집’은 제목만 들으면 왠지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귀여운 느낌을 줍니다. 사실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성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노라가 살고 있는 집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의 제목을 ‘인형의 집’이라고 이름 붙일 만 합니다. 이쯤에서 우리 ‘노라’의 집으로 들어가 봅시다.

헬메르: (방안에서) 거기서 조잘대며 노래 부르고 있는 건 내 종달새지?

노라: (한두 개의 포장을 풀면서) 네, 그래요.

헬메르: 우리 귀여운 다람쥐는 잘도 뛰어다니는군.

노라: 그래요.

헬메르: 우리 다람쥐는 언제 돌아왔지?

노라: 지금 막 왔어요. 이리 와서 제가 사 온 물건 좀 봐 주세요.

헬메르: 아, 귀찮은데! 물건을 사 왔다고? 아니, 그걸 전부 사왔단 말이야? 또 우리 종달새가 밖에 나가 돈을 뿌리고 오셨군.

노라와 헬메르는 부부입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전히 아름답고 따스해 보이나요, 아니면 뭔가 비판할 만한 것들이 보이나요? 이 어여쁜 아내가 ‘종달새’와 ‘다람쥐’가 되기 싫어서 남편과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집을 나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비슷한 예를 다시 만들어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어느 40대 남편의 아내이자 중학생의 어머니인 여성이 감히 자기 자신의 삶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면 이 여성을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이 여성에게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자식들을 잘 키울 의무가 있습니다. 이 여성은 미래를 약속한 남성와 함께 가정을 지켜나갈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여성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갈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이 여성은 자기 인생의 선장으로서 자기 삶에 관한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성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종달새이자, 다람쥐이자, 인형이었던 노라는 다음과 같이 종달새와 다람쥐와 인형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노라의 대사) 어쩌다 다른 생각을 가질 때가 있어도 저는 그것을 숨겼죠. 왜냐하면 아버지가 기뻐하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저를 인형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인형과 노는 것처럼 저와 놀아주셨어요. 그러다 당신과 결혼한 거예요. (중략)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이 집에서 가난뱅이처럼 살아온 것 같아요. 당신에게 재롱을 떨어서 그걸로 목숨을 이어온 거지요. 그게 당신의 바람이기도 했고요. 당신과 아버지는 저에게 큰 죄를 지은 거예요. 제가 이렇게 무능해진 것도 당신들 책임이에요. (중략)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이 집은 놀이터에 지나지 않았어요. 친정아버지가 저를 어린 인형으로 취급했다면, 당신은 다만 저를 큰 인형으로 취급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들이 제 인형이 되었어요. 아이들과 놀아주면 아이들이 기뻐하듯이 저는 당신이 놀아주면 그것이 기뻤던 거예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결혼이었어요.

사람들에겐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이나, 어른들은 여러분을 부를 때 여러분의 이름을 부를 겁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한국의 기혼여성(결혼한 여성)들은 ‘아무개 엄마’로 불립니다. 이 ‘아무개 엄마’가 자신의 남편과 자신의 자식에 의해 역할과 지위가 결정된다면 ‘아무개 엄마’도 아니고 ‘누구의 남편’도 아닌 ‘진짜 나’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노라가 했던 고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세상의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끝없는 희망과 좌절과 설렘과 고통을 낳게 하는 ‘자아 정체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노라는 ‘나는 누구일까?’ 하는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고민의 결과는 ‘노라라는 여자는 인형이 아니다’라는 생각이었겠지요. 130년 전에 만들어졌던 연극 작품 속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 작품이 지금까지도 중요한 이유는 아직 우리 사회의 여성이 남성과 같은 고유하고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어에 ‘she’라는 말과 ‘he’라는 말이 있습니다. ‘man’이라는 말과 ‘woman’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 우리말에는 ‘그’라는 아주 오래된 말과 ‘그녀’라는 그리 역사가 길지 않은 말이 있습니다. ‘she’, ‘woman’, ‘그녀’라는 말은 ‘he’, ‘man’, ‘그’라는 말에 각각 ‘s’, ‘wo’, ‘녀’라는 말이 덧붙여 만들어진 것이지요. ‘남녀차별’이라고 말하지, ‘여남차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언어는 여자가 아닌, 남자를 기본형으로 삼습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어떤 소설은 여자를 ‘wom’으로 명명하고, 남자는 ‘manwom’으로 명명했습니다. 귄터 그라스는 ‘넙치’라는 소설에서 현재의 역사는 피로 얼룩진 남성 중심적 정복의 역사이므로 ‘요리’와 ‘식탁’의 변천사가 중심이 된 생명성을 지향하는 역사가 우리 인류의 가장 중요한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이는 이유도 여성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될 수 있는 통로를 충분히 넓혀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19세기의 노라가 21세기의 여자에게 이렇게 물어볼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형인가요?’, ‘인형의 집에 살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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