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우리학교 논술 수업]서울 계성여고

  • 입력 2006년 11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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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 계성여고 1학년 1반 도덕 수업시간. 이용준 교사가 영화 ‘노는 계집 창’의 포스터를 보여 주면서 ‘성매매는 과연 직업인가’를 토론하기 위한 다양한 생각거리를 학생들에게 던져 주고 있다. 신원건 기자
8일 서울 계성여고 1학년 1반 도덕 수업시간. 이용준 교사가 영화 ‘노는 계집 창’의 포스터를 보여 주면서 ‘성매매는 과연 직업인가’를 토론하기 위한 다양한 생각거리를 학생들에게 던져 주고 있다. 신원건 기자
[이지논술/우리학교 논술 수업]서울 계성여고

《2008학년도 입시부터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이 도입하는 통합교과형 논술을 두고 일선 교사들이 난감해하고 있다. 마땅한 교재나 교수법이 없는 상황에서 여러 과목을 넘나드는 논술 강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여간 고민이 큰 게 아니다. ‘이지논술’은 나름의 방식으로 알차게 논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공교육 현장을 격주 시리즈로 소개한다.》

가요-뮤직비디오-영화 활용 논술과 친근하게

학생들 눈높이 맞춰 자유로운 토론 이끌어내

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계성여고 도서관. 이용준(27) 교사가 1학년 1반 학생 34명에게 묻는다. “사람이 직업을 갖는 목적은 뭘까?” 학생들이 합창이나 하듯 “자아실현요!” 한다. 이 교사가 “좀 뻔한 대답이죠?”하고 되받자, 학생들은 까르르 웃는다.

‘말할 수 없는 직업’이란 알쏭달쏭한 제목으로 시작된 도덕 수업시간. 이 교사는 노동부가 발표한 직업별 연봉 순위를 스크린을 통해 보여 준다. 이어지는 질문.

“여기 등장하지 않은 직업 중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 하나 있어요.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 직업, 하지만 동시에 한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직업. 그게 뭘까요?”

학생들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 교사는 영화 포스터를 스크린에 보여 준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노는 계집 창(娼)’이다.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성매매는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죠. 자, 과연 성매매도 직업일까요?”

이 교사는 다시 경찰의 성매매업소 단속 현장을 담은 TV 고발 프로그램 한 토막을 보여 준 뒤 토론을 제안한다. 학생들은 6개조로 나뉘어 조별 토론에 들어갔다. 얼마 후 조별 대표가 나왔다.

“우리는 성매매를 직업으로 인정하는 것에 반대해. 자신의 성을 매매하는 행위를 만약 직업으로 인정한다면 성매매를 하는 남자들의 아내들이 피해를 보는 악순환이 계속돼. 성매매 여성들에게는 정부가 기술 교육을 시킨 뒤 직업을 알선하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지었어.”(A 학생)

“우리는 찬성합니다. 헌법에는 직업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성매매 여성도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성매매를 선택했다면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성매매 처벌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성매매를 음성적으로 확산시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B 학생)

이에 질문을 다시 던지는 이 교사.

“자기가 만족하다고 해서 직업으로 인정한다? 그러면 ‘사기꾼’은 어떻게 봐야 할까? 사기꾼이 만약 ‘나는 내 직업에 너무 만족해요’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기꾼을 직업으로 인정해야 할까?”

계성여고의 논술수업을 이끄는 이 교사. 그는 도덕, 윤리 정규 수업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논술에 필요한 ‘근원적인 유전자’를 심어주는 데 주력한다. 유연하게 사고하고 스스로 질문을 품는 습관을 갖는 것이 바로 ‘논술 유전자’다. 도덕, 윤리 시간에 교과내용을 토대로 학생들이 쓴 논술답안은 수행평가 점수로 반영된다. 2학년이 되면 방과 후 수업이나 보충수업을 통해 원하는 학생에 한해 논술지도에 들어간다. 3학년들은 지원 대학에 맞춰 개별 첨삭지도를 받는다.

가수 조용필 팬클럽 ‘미지의 세계’ 회원이기도 한 이 교사. 그는 이 동호회가 7월에 연 조용필 헌정공연에서 드럼을 연주할 만큼 재능도 관심사도 많다. 신세대 교사인 그가 논술수업에서 특히 신경 쓰는 대목은 ‘눈높이’.

멀티미디어를 수업에 활용하는 것도 학생들에게 빠르고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다. 가요 팝이나 뮤직비디오, 영화를 전방위로 끌어들인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The Wall)’ 뮤직비디오로는 규격화된 인간을 만들어 내는 교육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영화 ‘헤드윅’을 통해서는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이란 노래의 가사가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서 따온 것임을 알려주면서 동성애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본 뒤 ‘동성애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토론했다.

사사건건 의문을 품고 반론을 펴고 자유로운 상상을 하는 논술 유전자를 학생들에게 심어 주려다 보니 이 교사는 난처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낯설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선생님. 체육시간에 피구를 했는데 우리 팀 애들이 반칙을 했다는 이유로 몰수 패를 당했어요. 왜 잘못한 소수 때문에 전체가 피해를 보죠? 축구를 보세요. 한 선수가 고의 태클을 걸어도 그 선수만 레드카드를 받지 팀 전체가 몰수 패를 당하는 건 아니잖아요?”

“선생님. 지각 세 번하면 운동장 8바퀴를 돌아야 하는 학교 벌칙은 문제가 있어요. 저마다 지각한 사정이 다르고 체력이 다를 텐데 왜 똑같이 8바퀴를 뛰어야 하죠?”

이 교사는 조례·종례시간을 통해 답한다. 못 다한 질문과 대답은 e메일이나 인터넷 메신저로 계속된다.

“논술교육의 핵심은 끝없는 질문과 대답”이라는 이 교사.

“똑똑한 학생들일수록 양시론이나 양비론으로 모든 걸 아우르려 하거나 서로 다른 의견을 절충하려는 ‘겁 많은 태도’를 논술에서 보입니다. 자신만의 시야를 스스로 넓히도록 유도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학생들이 제시문의 틀에 갇히지 않고 창의적인 답안을 쓸 수 있죠. 느리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학교만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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