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 대학의 인문학 교육 실태는…

  • 입력 2006년 9월 27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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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살리자”전국 93개 대학 인문대학장들이 28일 오전 서울 이화여대 국제교육관에서 열린 ‘인문주간’ 개막식에서 침체된 인문학의 진흥을 주제로 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인문학을 살리자”
전국 93개 대학 인문대학장들이 28일 오전 서울 이화여대 국제교육관에서 열린 ‘인문주간’ 개막식에서 침체된 인문학의 진흥을 주제로 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무차별적 시장논리’ ‘대학의 상업화’ ‘계량적 평가’.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은 ‘인문학 위기 선언’을 통해 위기의 ‘근인(根因)’을 이렇게 짚었다. 비록 명시는 안 했지만 이는 곧 무한경쟁시대의 이념적 기반인 ‘신자유주의’를 지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엔진’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의 인문학은 어떠한가. 변방이 위기라면 중심은 고사(枯死) 상태에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인문학은 학부 학생들의 교육에 중점을 두는 인문대(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중심으로 건재하다. 유럽은 더더욱 ‘위기’와 거리가 멀다.

○ 리더의 소양-인문학

1990년대 초 미국 명문 사립인 시카고대에 휴고 소넨샤인 총장이 취임했다. 소넨샤인 총장은 입학 후 2년간 전공 없이 인문학 고전만을 읽히는 커리큘럼을 바꾸기 위해 메스를 들었다. 시카고대 학부생들은 입학 후 플라톤에서부터 니체에 이르는 철학자, 호메로스부터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는 문호들의 대표작을 읽고 토론했다. 소넨샤인 총장은 고전의 지나친 강조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며 교양수업 기간을 단축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계약 위반’이라고 극렬히 반발했고, 그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시카고대는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등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뼈대를 제공한 ‘시카고학파’의 요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이 먼저’라는 시카고대의 교육철학은 여전히 ‘진리’로 통한다.

미국에는 217개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가 있다. 이들 대학은 하버드나 예일 등 대학원 중심의 규모가 큰 대학과는 달리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기초 교양과목에 매진한다. 이들의 교육철학은 확고하다. 탄탄한 교양과목의 이수와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리더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미 대학평가 결과 리버럴 아츠 칼리지 분야 서열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애머스트대 학생들도 2학년까지 전공을 정하지 않고 기초 과목에만 몰두한다. 미국 오리건 주 리드대의 경우 1학년 학생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헤로도토스의 ‘역사’, 플라톤의 ‘공화국’, 아우구스투스의 ‘고백록’ 등 고전 40여 권을 읽어야 한다. 제대로 읽지 않고 강의에 들어갔다가는 교수의 호된 핀잔을 각오해야 한다.

○ 유럽은 ‘위기’를 모른다

‘레이거노믹스’의 미국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쌍두마차로 불렸던 ‘대처리즘’의 영국도 ‘인문학의 위기’를 모른다.

영국의 런던유니버시티칼리지(UCL)는 1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기초 학문에 강하다. 특히 이종(異種) 학문 간 벽을 허무는 기초 학문의 ‘융합’을 오래전부터 실험해 왔다. 일례로 철학과 프랑스어, 역사와 과학같이 이종 학문을 통합해 전공으로 만들거나 라틴어와 그리스어, 철학과 그리스어를 한데 묶기도 한다.

옥스퍼드대의 경우 교수직 한 자리를 유지하는 데 기금이 한 해 기준으로 180만 파운드(약 32억 원)나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가치가 있다면 현재 사용하지 않는 고어라도 담당교수를 유치해 연구를 지원한다. 이집트의 옥시린쿠스에서 발굴된 파피루스만을 연구하는 교수를 따로 둘 정도다.

프랑스는 고등학교부터 문사철(文史哲)을 배운다. 대학입학시험인 ‘바칼로레아’에는 철학이 포함돼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신자유주의나 세계화의 진전 및 확산 속도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성과에만 목을 매는 천박한 우리 사회의 풍토가 인문학 위기의 주범이다.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 93개대 인문대학장 성명

‘인문주간’(25∼30일)은 인문학적 성과의 사회 환원과 문화경쟁력 증진, 인문학 부흥 방안 모색을 목적으로 한 행사로 올해가 첫 회다.

26일 개막식에는 인문학계 인사, 일반인, 취재진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하지만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의 ‘인문학 위기 선언’ 이후 열린 행사여서인지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서 전국 93개 인문대 학장은 성명서를 통해 “그동안 엄정한 자기성찰, 적극적인 현실참여로 대안적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 채 인문학 위기라는 담론 뒤로 몸을 숨겨 온 인문학계 내부의 상황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그러나 문제의 근원은 인문학적 정신, 가치를 경시하는 사회구조 변화에 있으며 이를 주도한 정부 당국과 그 변화에 순응한 대학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들은 인문학 진흥을 위한 방안으로 △정부 주도의 ‘인문학진흥기금’ 설치 △인문학 발전을 위해 교육부총리 산하에 인문한국위원회(Humanities Korea·가칭) 설치 △국가 주요 정책위원회에 인문학자 참여 보장 △인문대학장, 교육인적자원부, 학계, 관계기관이 참여하는 ‘인문학발전추진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했다.

개막식 직후 국공립대를 제외한 50여 개 사립대 인문대학장은 ‘전국사립대인문대학장협의회’를 구성하고 초대 회장에 조광 고려대 문과대학장을 선출했다. 하지만 시작 10여 분 만에 협의회 출범 동의, 회장 선출 절차 등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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