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romanticism)
데카르트의 기계론 철학과 뉴턴 역학 등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근대적 세계관은 18, 19세기를 풍미하였다. 그러나 기계론적, 결정론적 성향을 가진 주류 세계관에 반발하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으니, 이를 ‘낭만주의’라고 부른다.
낭만주의는 특정한 ‘사조’를 뜻한다기보다 합리주의에 반대되는 정신적 상태 또는 성향을 뜻한다. 합리주의가 주지적이고 수학적 분석을 중시하였으며 대체로 기계적 세계관을 수반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낭만주의는 사물을 수학적인 대상을 환원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를 유기체적 전체로 보고 이를 감성과 직관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수학적 도구를 활용하는 역학이나 천문학보다는 자연사(natural history)나 실험과학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계몽 자체를 반대했다기보다는 계몽의 ‘방식’에 있어 합리주의와 대립하였다. 이성(또는 과학)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세계의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하고, 그러한 면에서 오히려 세계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대조> | ||
합리주의 | 낭만주의 | |
성향 | 주지적, 이성 중시 | 주정적, 감성 중시 |
참된 지식획득 방법 | 수학적 분석 중시 | 감성과 직관에 의한 파악 중시 |
세계관 | 기계적 | 유기체적 |
진보관 | 필연적 진보 믿음 | 부분적으로 진보에 대한 회의 |
지역 | 영국, 프랑스 중심 | 독일, 러시아 중심 |
아도르노
자연으로부터 끊임없이 그 생존을 위협받던 인간은, 자연을 탈신비화해 유기체적 전체에서 분리함으로써 인간이 활용하고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게 된다. 아도르노는 그의 저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일화를 들어 이 과정을 “합리적 질서의 힘으로 신화를 파괴하는 이성의 업적”이라고 서술하며 이로부터 인간의 책략에 의한 자연지배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인간은 자연을 탈신비화함으로써 무력화하였고 이성의 지배하에 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외부의 자연(nature)에 대한 지배는 인간의 본성(nature)에 대한 지배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자연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억압적인 사회조직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사회조직에 포함됨으로써 인간은 자연으로부터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생각은 진보적 역사관과 정면으로 상충하며 문명의 역사 전체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는 문명의 전 역사가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을 수반하였으며, 외적 자연에 대한 지배와 내적 자연(본성)에 대한 지배가 맞물려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해방’이나 ‘진보’의 전망을 완전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과학기술은 외적 자연과 내적 자연(본성) 양편의 억압을 위해 활용되는 도구이다. 즉 과학기술이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와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를 동시에 발생시키는 주요한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한때 몸담았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출신의 학자들을 흔히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부른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는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프롬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에는 다양한 해방의 기획을 모색한 사람도 있으나, 아도르노는 체념과 비관의 정조 속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하이데거
이러한 점에서 하이데거는 기술 속에 위험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기술이 인간도 수단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하이데거가 이렇게 기술의 위험을 언급하는 것은 기술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라기보다 기술의 본질이 대상을 대하는 방식, 즉 대상을 파헤쳐 원리를 파악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그 방식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상을 경험하는 이러한 방식이 일반화됨에 따라 인간은 시원적인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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