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대기업 입사 대졸 여성 10년새 63% 퇴직

  • 입력 2006년 8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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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대기업 홍보실에 입사해 2년 동안 사보(社報) 제작을 맡았던 유모(34·여) 씨는 1998년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뒀다. 유 씨는 “당시만 해도 같은 신입사원이라도 남자는 6개월만 지나면 실무를 배우는데 여자에게는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던 분위기”라며 “승진을 못 해 ‘만년 대리’로 불리던 다른 여자 선배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출산 후 다시 취업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대기업 근무 경험은 내세울 만한 경력이 되지 못했다. 영어 강사로 일하다 전문직을 찾아보려고 여성가족부의 직업교육도 받았지만 마땅한 일이 없었다. 현재 그는 첫 직장에서의 경험을 살려 잡지 편집을 하고 있다. 유 씨는 “지금이라면 그렇게 쉽게 회사를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최근 10년간 고급 인력시장에 진입하는 여성이 크게 늘어났지만 이들의 중도탈락률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취업자 중 여성의 비중은 1996년 2분기(4∼6월) 40.8%에서 올해 2분기 42.1%로 늘었다. 본보 조사 결과 매출액 기준 10대 기업에 입사한 대졸 여성의 비중은 같은 기간 11%에서 19.3%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0년 이상 대기업에 남아 있는 여성 비율은 37%로 남성 54%에 비해 17%포인트나 낮았다.

○ 여성 커리어우먼들의 ‘쓰라린 과거’

1996년 공채로 한 대기업에 입사했던 박모(35·여) 씨는 고과에 특별한 문제점이 없었는데도 2002년 과장 승진에서 탈락했다. 박 씨는 “당시 사내에선 ‘여성이 과장으로 승진하려면 재수는 필수’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며 “그 말이 현실로 다가오자 이 조직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사표를 냈다”고 말했다.

명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옛 대우 계열사에 입사했던 이모(34·여) 씨는 대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중요 부서’로 꼽히는 자금팀에 발령받았다. 그러나 6개월 동안 잡무만 하다 회사를 그만뒀다. 이 씨는 “팀장도 나에게 어떤 일을 줘야 할지 몰랐고 나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했다.

대졸 여성 사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는 이처럼 여성 신입사원의 역할이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기 어려웠고, 핵심 업무에 욕심을 내려면 주위에서 “극성맞다”는 평을 들을 각오를 해야 했다.

2006년 상반기 10대 기업 대졸 신입사원 현황 (단위: 명, %)
구분남성여성여성비율
국민은행927845.8
기아자동차199219.5
삼성생명1154528.1
삼성전자240060025.0
SK(주)682022.7
LG전자120030020.0
GS칼텍스371224.5
포스코129139.2
한국전력공사1685223.6
현대자동차7519010.7
합계5159123119.3
회사명은 가나다순. (자료: 각 회사)

○ 사회적 여건은 나아졌다지만…

최근 일부 기업의 여성 신입직원 채용 비중이 30%에 이를 정도로 크게 늘면서 기업도 여성 인력 활용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김모(35·여) 과장은 “입사 초기만 해도 한 부서에 여성이 한두 명 정도여서 중요한 업무를 맡을 기회가 적었다”며 “지금은 여성 인력을 빼면 업무 추진이 어렵다”고 말했다. ‘소수’여서 겪었던 차별이 줄어든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육아와 가정의 ‘1차 책임자’란 굴레가 승진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1996년 대기업 입사 후 줄곧 해외 마케팅 담당으로 일해 온 이모(35·여) 과장은 2년 전 스스로 내린 결정 때문에 여자 동료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해외지사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함께 갈 수 없는 남편 때문에 일을 포기했던 것. 이후 이 회사에서는 “아직은 여성의 해외 근무는 무리”라며 여직원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잦은 야근 등 회사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핵심 인재’로 인정을 받는 기업 분위기도 여성에게는 넘기 쉽지 않은 벽이다.

대기업 김모(35·여) 과장은 자신이 최고 등급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기혼 여성’에게 부족한 ‘2%’ 때문으로 여긴다. 그는 “근무시간에만 열심히 일해서는 ‘헌신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 여성인력 유지는 기업과 여성이 ‘윈윈’

일을 그만뒀다 다시 취업하는 여성들은 이전보다 열악한 여건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본보가 온라인 채용정보업체인 잡코리아와 함께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일정 기간 일을 하지 않다가 재취업에 성공한 여성 595명 가운데 대기업에서 다른 대기업으로 재취업한 여성은 24%인 반면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이나 소기업으로 옮긴 여성은 76%나 됐다.

이전 직장과 비교한 연봉 수준에 대해서도 ‘비슷하다’(44.7%) 또는 ‘더 적다’(35.3%)는 응답이 ‘더 많다’(20.0%)를 압도했다.

최근 여성 취업이 크게 느는 추세지만 남성에 비해 ‘취업의 질’은 열악하다는 지적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얼마 전 한 보고서에서 “가계 소득 보전을 위해 주부들이 취업전선에 참여하면서 여성 취업자가 늘고 있다”며 “그러나 여성 일자리의 질이 남성 일자리와 비교해 열악하다”고 밝혔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여성 임금 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율은 43.7%로 남성의 31.5%에 비해 12.2%포인트나 높았다.

전문가들은 기업도 여성의 인력이 급증하는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4년제 일반대학을 비롯한 교육대 산업대 등의 신입생 중 여학생 비율은 지난해 47.8%에 이르렀다.

한국여성개발원 김남희 연구위원은 “고학력 여성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어 기업이 여성을 활용하지 않으면 가용 인재 폭이 곧 줄어들 것”이라며 “기업은 여성 인력 육성을 ‘부담’이 아닌 ‘생존’ 방안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 김향아 연구원은 “기업은 사원을 채용해 본격 업무를 맡길 때까지 상당한 투자를 한다”며 “여성이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비용이 아닌 투자”라고 강조했다.

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기업들 여직원 챙기기▼

KTF 품질개선팀 오미나(37) 팀장은 직장생활 10년차가 되던 2003년 말 10주 동안의 ‘기업여성리더십’ 과정을 이수했다.

이 회사는 반기별로 사내(社內)공모를 통해 선발된 여성 인력을 대상으로 여성 중간 관리자에게 필요한 지식과 노하우를 가르치고 있다. 이화여대에 위탁해 운영하는 이 과정은 지금까지 5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오 팀장은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며 “정보를 공유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최근 여성 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여성 인력 붙잡기’에 나서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일정한 경력을 쌓은 여성 인재가 출산이나 육아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GS칼텍스는 선배가 후배를 일대일로 교육하는 ‘멘터링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이 회사는 여성 인력만을 위한 멘터링 프로그램을 따로 마련해 여성 인력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사내외 ‘대화 채널’을 강화하는 내용을 집중 교육한다.

르노삼성자동차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프랑스 마케팅 전문학교 ESSEC MBA에 유학하면 학비 전액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남녀에 상관없이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 과정을 마치고 이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 5명 가운데 4명이 여성이다.

여성 인력을 붙잡기 위해서는 육아 지원도 중요하다.

삼성전자 여성인력개발센터에는 모유수축실과 학습 자료실이 있다. 이 회사는 사내 탁아소와 모성보호실도 운영한다. LG전자는 연말까지 점차적으로 전국 각 사업장에 보육 시설을 설치할 계획이다.

하지만 아직은 고위직까지 올라가는 여성 인력이 적은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국내 10대 그룹의 평균 여성 임원 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한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여성 인력이 중간 퇴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육아와 가사 부담 때문”이라며 “기업이 이를 보완하는 장치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부 차원에서도 양육시설 등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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