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 구술잡기]‘오래된 미래’

  • 입력 2006년 4월 8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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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245쪽·8000원

녹색평론사

구술 문제는 대개 논술보다 질문이 짧다. 말과 글의 사고 호흡이 서로 다른 탓이다. 그러나 간결한 답변이라도 갖추어야 할 구색은 논술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사람을 마주한 상황에서는 논증력 못지않게 호소력도 중요 사항이다.

이 책은 서양의 한 여성 언어학자가 히말라야 고원의 라다크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환경친화적이고 평화롭던 생활 방식이 서구식 개발을 겪으면서 어떻게 붕괴되어 갔는지를 조용하게 증언한다. 저자의 애정 어린 시선과 세심한 묘사는 상호 공감의 원리를 자연스레 터득하게 해 줄 것이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라다크 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공존이다. 음식을 만든 후의 곡식 찌꺼기는 술을 만들고, 다시 술 찌꺼기는 말리면 간식이 된다. 설거지물은 짐승에게 먹이고, 짐승의 배설물은 퇴비로 쓰거나 말려서 연료가 되는 식이다. 그들의 삶에 체화된 ‘검소’와 ‘재생’은 ‘지속가능한 개발’의 원형이다.

공동체적 습관과 관용을 중시한 생활상도 인상 깊다. 라다크 인들은 ‘언쟁’하지 않고 ‘의논’을 한다. 갈등은 없으나 의견 반대는 있다. 사람에 대한 가장 나쁜 평가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 커다랗고 깊은 라다크식 웃음은 내면의 평화와 행복의 소중함을 공감하게 한다.

재미있는 인용은 핵심 주장을 부각시켜 준다. “말을 100마리 가진 사람도 채찍 하나를 빌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할 때가 있다.” 라다크에 전해 오는 이 속담은 공존의 지혜를 드러낸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외모보다 성품을 중시하는 인간적 가치관의 표현이다.

그러나 1970년대 산업화 이후의 라다크는 전형적인 개발의 전개 과정을 보여 준다. 도시에서는 에너지 사용이 늘고 순환되지 않을 쓰레기와 인간의 배설물이 넘쳐 났다. 농촌은 해체되고, 스트레스나 암 등 문명에서 오는 병이 증가되었다. 이 책은 산업화와 전통의 해체 과정을 겪지 못한 우리 학생들에게 역사 체험의 소중한 현장을 제공한다.

현실적 대안은 주장의 설득력도 한층 높여 주는 법. 사실 현대 문명을 거슬러 농업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개발의 방법과 목표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자연을 해치고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 자본 대신 인간적인 규모의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이 책을 통해 세계화 시대의 생태적 대안도 함께 고민해 보기를 바란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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