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가 없어요]<下>기댈 언덕이 없다

  • 입력 2005년 10월 26일 03시 06분


코멘트
가정이 해체되면서 홀로 남은 아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절실하다. 부모와 사회의 보호 없이 뛰노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그늘이 느껴진다. 강병기 기자
가정이 해체되면서 홀로 남은 아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절실하다. 부모와 사회의 보호 없이 뛰노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그늘이 느껴진다. 강병기 기자
《병숙(가명·3·여)이는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안에서 100일을 보내면서 청각과 시각, 근육에 장애가 생겼다. 그런데 퇴원할 무렵 부모가 갑자기 사라졌다. 병원은 치료비 500만 원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부모는 “미숙아를 키울 자신이 없다”며 연락을 끊었다. 결국 병숙이는 한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최근 경제난과 이혼 등 가정이 해체되면서 홀로 남은 아이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감은 사라지고 ‘자식=짐’으로 인식되고 있다.

정부 역시 홀로 된 아이들을 제대로 수용해 건전한 사회의 일원으로 키워 내야 하지만 예산 및 인력 부족과 인식 결여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부실하다.

▽‘제도가 버린 아이들’=1년 전 이혼한 김은선(가명·35·여) 씨는 며칠 전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전 남편이 함께 살고 있던 아들 주훈(가명·5)이를 보육원에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왔지만 주훈이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입니다. 부모 이혼에 보육원까지 두 번이나 큰 상처를 줬으니…. 아이를 볼 면목이 없네요.”

올해 초부터 9월까지 서울시아동복지센터에 들어온 아이들을 원인별로 보면 이혼, 부모 가출 등 가정 해체로 홀로 된 아동이 전체 287명 중 59%(169명)에 이르고 있다.

문제는 상당수 부모가 아동복지센터에 있는 아이들이 자신의 친자식임을 확인한 뒤에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싱글 맘(대디)’이 이혼한 남편(아내)의 동의를 받지 않고서도 아무 때나 자녀를 보육시설로 보낼 수 있도록 돼 있는 아동복지법상의 현행 규정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황은숙(黃恩淑) 한국한부모가정연구소 소장은 “아동복지법을 개정해 이혼한 부부가 아이를 보육시설에 보낼 경우 다른 한쪽의 사전 동의를 받는 것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홀로 남은 아이 중 가정위탁은 극소수=기철(가명·6)이는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3년째 다른 가정에 위탁돼 생활하면서 여느 아이처럼 밝게 자라고 있다. 비록 피를 나눈 부모는 아니지만 기철이는 위탁 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잘 따른다.

홀로 남은 아이가 다른 가정에 위탁되면 정서적으로 안정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하지만 국내에서 기철이 같은 사례는 선택받은 소수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보호가 필요한 아동 9393명 중 친척이나 다른 가정에 위탁된 경우는 2212명뿐이었다.

한국복지재단 강원도 가정위탁지원센터의 한태화(韓兌和) 사회복지사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모들은 보통 1∼5년 계약으로 다른 가정에 아이를 위탁하는데, 이 중 위탁 뒤 아예 연락을 끊어 버리는 부모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홀로 남은 아이를 위탁하는 가정에 대한 정부 지원도 미미하다. 아이 양육비 명목으로 매달 지급되는 7만 원이 전부다.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 시급=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 아동이 버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홀로 남은 아동은 국가에서 책임진다. 보육시설은 10명 내외의 소규모로 운영되고 다른 가정에 위탁하거나 입양시키는 게 일반화돼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대부분이 보육원이나 민간보육시설에 보내진다.

이정희(李正喜) 서울시아동복지센터 소장은 “국가가 직접 나서서 소규모 보육시설을 운영하고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부모를 지원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소장은 “보육시설이 들어서려고 하면 그 지역 주민들이 ‘내 집 주변에는 안 된다’며 반발하는 ‘님비(NIMBY)’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숙명여대 이재연(李在然·아동복지학) 교수는 “최근 사회 전반적으로 자녀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된 부모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며 “정부나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상담사 제도를 운영하고 빈곤층 가정을 방문해 자녀 양육을 도와 주거나 아이를 잠시 맡아 주는 공공기관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이진구 기자 leej@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보육시설 생활은 아이들에 큰 상처”▼

“아이들에게 보육원(고아원) 생활은 큰 상처로 남습니다. 힘들어도 가족이 함께 살아야죠.”

서울 강남구 수서동 서울시아동복지센터 인준경(印準卿·51·사진) 보호팀장은 25일 홀로 남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77년 서울시 공무원이 된 후 28년째 아동보호 업무만 해 온 주인공이다.

아동복지센터는 보육시설로 가기 전에 홀로 남은 아동들이 잠시 머무는 곳. 18세 미만의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최대 3개월까지 보살핀다. 아동학대 신고(국번 없이 1391)를 24시간 접수하고 있으며 아동 보호 및 부모 교육도 맡고 있다.

복지센터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아이는 엄마 아빠를 찾지 않고 울지도 않는다. 오히려 낯선 복지센터 생활에 천연덕스럽게 적응을 잘한다. 부모의 따스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매주 30∼50명의 홀로 된 아동이 복지센터에 들어옵니다. 대부분이 빈곤층 아이이고 이 중 절반 이상이 부모에게서 학대를 받은 경우죠.”

인 팀장에 따르면 홀로 남은 아이의 유형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6·25전쟁 직후에는 전쟁고아, 1960, 70년대는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가출 아동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혼 등 가정 해체로 세상에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과거에는 부모와 떨어진 자녀가 있으면 친인척이 맡는 게 당연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쉽게 가정을 이루고 쉽게 헤어지면서 아이를 서로 맡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친척마저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픕니다.”

인 팀장은 최근 홀로 남은 아이들이 ‘대물림’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버려진 아이는 결혼해서 자식에게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부모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복지센터에서 자식을 데려갈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인 팀장. 그는 “정년이 될 때까지 소외된 아이들에게 잠시나마 부모 역할을 해 주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