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권 “무조건 네탓” 덮어씌우기 판친다

  • 입력 2005년 10월 21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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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권에선 ‘참을 수 없는 가벼움’만 남았다는 자조의 소리가 나온다.

현 정부 인사들은 어제 이 말 하고 오늘 저 말 하면서도 ‘말 바꾸기’ 지적에 대해서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변명하고 있다. 정적을 향한 ‘낙인찍기’도 횡행하고 있다.

또 정치철학과 노선에 근거한 토론과 협상은 사라지고 ‘유신독재의 망령을 부활시킨 유신잔당’이라거나 ‘친북 좌파 정권’ 같은 섬뜩한 용어를 동원한 자극적인 공방만 난무하고 있다.

▽본질뒤틀기=동국대 강정구(姜禎求) 교수 사태가 정치 공방으로 확대되면서 지금의 파문으로 비화된 것은 검찰 수사에 대한 권력의 개입이 발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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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교수가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식의 발언을 계속한 데 대해 경찰과 검찰이 이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판단해 수사에 나선 것은 통상적인 법 집행 과정에 해당한다.

문제는 강 교수의 사법 처리와 관련해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등이 ‘구속 반대’ ‘신중한 수사’ 등의 의견을 개진하며 법 집행 과정에 ‘관여’했다는 점이다.

문희상(文喜相) 열린우리당 의장은 10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강 교수 사법 처리는 신중해야 한다”고 공개 언명했고, 청와대도 비슷한 시점에 이 같은 의견을 검찰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12일 천정배(千正培) 법무부 장관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불구속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결국 천 장관의 지휘권 행사는 권력의 입장을 반영해 검찰 수사에 개입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 독립성’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논란이 벌어졌다. 이에 검찰이 반발하고 김종빈(金鍾彬) 전 검찰총장이 사퇴하는 사태까지 초래됐다.

요컨대, 최근 사태의 본질은 ‘검찰 독립’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파문이 확대되자 여권은 천 장관의 불구속 수사지휘권 행사는 인권보호 차원의 조치였다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여권 인사들은 “공안사범의 인권은 인권이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검찰의 정치 중립을 훼손하면서까지 공안사범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저의가 뭐냐는 야당에 지적에 대해 여권은 ‘수구세력의 색깔론’으로 호도하고 있다. 또 수사지휘권 발동과 검찰의 중립성 훼손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독극물’ ‘혹세무민(惑世誣民)’ 등의 극단적인 용어까지 써가며 파문의 책임을 언론에 전가하고 있다.

이 와중에 정작 논란의 핵심인 검찰의 중립성 문제는 실종된 상태다.

이와 관련해 한 언론학자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 확보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이를 감시하는 것은 언론의 당연한 의무인데 이를 탓하는 것은 본질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낙인찍기=강 교수 사태의 공방에서 특히 여권은 자극적인 용어로 상대방에 대해 이미지 덧씌우기, 즉 ‘낙인찍기’로 공방전을 이끌고 있는 양상이다.

낙인찍기는 원래 범죄학에서 유래된 용어로 사회제도나 규범을 근거로 특정인을 일탈자로 지목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결국 범죄인이 되고 만다는 것.

이 같은 낙인찍기는 피아(彼我)의 구별이 명확해져 상대방을 흠집 내는 동시에 자기 편을 견고하게 결집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시절에도 정권에 의한 진보진영 낙인찍기가 유행했었다. ‘빨갱이’ ‘좌경 용공’ 등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의 낙인찍기도 주로 정권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다만 대상이 바뀌었다. 보수진영에 대해 ‘상종 못할 수구꼴통’ ‘냉전 수구세력’ ‘유신독재 망령의 부활’ 등의 딱지 붙이기가 성행하고 있는 것.

야당도 여권에 대해 ‘북한 비위 맞추기’라며 일부 낙인찍기를 시도하고 있지만 구태의연한 색깔론으로 비하되기 일쑤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박성희(朴晟希) 교수는 “상대방에 대한 평가가 풍자나 패러디 등의 수준을 넘지 않을 경우 별문제가 없지만 현재의 상황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은 채 극단적인 비방이 오가고 있어 건전한 정치문화 정착에 방해가 된다”고 말했다.

▽이중잣대=현 정부 인사들의 이중 잣대도 논란거리다.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에 관한 천 장관의 입장 변화가 그 단적인 사례다.

천 장관은 1996년 이후 사악한 정권이든 선량한 정권이든 검찰 독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폐지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강 교수 사태와 관련해 사상 초유의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뒤 이에 대한 논란이 일자 “시대가 변했다. 검찰도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한나라당이 과거 여당 시절에는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수사지휘권을 ‘옹호’하다가 막상 천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행사하자 검찰 독립 침해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중 잣대의 한 단면이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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