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피해 유가족의 그늘… 생활苦…마음病…‘두번 죽는 고통’

  • 입력 2005년 10월 17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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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살인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박은영 씨 가족은 현재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여기에다 두 아들은 만성신부전증과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수북이 쌓인 약이 박 씨 가족의 고통을 말해 주는 듯하다. 이훈구  기자
2002년 살인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박은영 씨 가족은 현재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여기에다 두 아들은 만성신부전증과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수북이 쌓인 약이 박 씨 가족의 고통을 말해 주는 듯하다. 이훈구 기자
《범죄 피해자. 그들은 이 사회의 또 다른 그늘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이따금씩 관심의 대상에 올랐지만 범죄 피해자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왔다. 그러나 범죄 피해자들은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과 궁핍, 질병 등 이중삼중의 고통 속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범죄 피해로 인한 고통은 피해자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까지 고스란히 미치고 있는 것이다. 범죄 피해자들의 삶과 피해자 대책의 문제점을 조명해 본다.》

“엄마! 아빠는 어디 갔어? 언제 오는 거야?”

“응, 아빠는 하늘나라에 가셨어. 하늘나라는 아주 멀리 있어서 오시는 데 오래 걸릴 거야.”

3년 전 살인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박은영(34) 씨가 둘째 아들(9)이 아빠를 찾을 때마다 하는 말이다. 아들이 ‘죽음’의 의미를 체감하지 못해 선의의 거짓말로 아들을 위로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박 씨의 마음은 무겁다.


살인사건이나 뺑소니 교통사고 등 각종 범죄로 생명을 잃은 피해자의 가족들은 박 씨처럼 힘겹게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극심한 생활고=박 씨가 남편을 잃은 것은 2002년 7월.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던 남편은 동료와 사소한 말다툼 과정에서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근근이 생계를 이어온 탓에 박 씨에게 남겨진 것은 별로 없었다. 이후 박 씨는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2년 큰아들(10)이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았다. 둘째 아들은 선천성 심장기형을 앓고 있던 중이었다. 다행히 큰아들은 올해 1월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신장수술을 받아 생명은 지켰으나 두 아들 모두 평생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

박 씨 가족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정부에서 매달 46만 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박 씨는 생계를 위해 하루 2만 원을 버는 전단지 배포 일을 하고 있으나 이마저도 일거리 찾기가 쉽지 않다. 박 씨는 현재 동생의 전셋집에 얹혀살고 있다. 10평도 안 되는 지하 셋방이다.

1997년 뺑소니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사망한 A(17) 양 자매도 사정이 어렵다. 정부 지원금과 친척들의 도움이 있긴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85)까지 모시고 있어 자매의 어깨는 무겁다. A 양의 어머니는 A 양이 두 살 때 집을 나갔다.

A 양은 “학교에서 돈을 내라고 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남은 가족의 몸도 마음도 병든다=폭력조직의 살인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B(38) 씨는 사건 이후 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B 씨는 “불안감 때문에 사람을 만나기가 두렵다”고 말했다. B 씨의 부모와 형제들도 늘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고통 받고 있다.

지난해 10월 살인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C(32) 씨도 범죄 피해의 후유증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경우. C 씨는 올해 초부터 남편의 사망에 따른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는 피부병이 온몸에 생겨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큰딸(9)은 남편 사망 이후 정신과 상담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정신불안 증세가 심해졌다.

C 씨는 “딸이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울 때가 가장 가슴이 아프다”며 “딸을 돌보느라 시간제 일도 할 수 없어 생계가 더욱 막막하다”고 말했다.

전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2002년 957건, 2003년 998건, 2004년 1083건, 올해는 8월까지 724건 등이다.

5대 강력사건(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도 지난해 45만5840건 발생했다.

살인과 강력 사건의 피해자도 그만큼 많은 셈이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범죄 피해자 대책의 문제점▼

범죄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경제적 고통을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호소하고 있다. 피해자는 대부분 성인 가장이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해지기 때문.

하지만 이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정부는 1987년 제정된 ‘범죄피해자구조법’에 따라 살인사건의 경우 1000만 원, 상해 1∼3급의 경우 300만∼600만 원의 구조금을 범죄 피해자 유가족에게 지급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박은영 씨와 A, B, C 씨 등도 정부에서 1000만 원씩의 구조금을 지급 받았다.

그러나 지급 요건이 까다로워 상당수 범죄 피해자들이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정부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지난해부터 범죄피해자 지원 대책을 보완하는 방안을 마련해 추진 중이다.

법무부는 구조금 지급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의 ‘범죄피해자구조법 개정안’과 범죄 피해자의 권리장전인 ‘범죄피해자기본법 제정안’ 등 5개 법률의 제정안과 개정안을 마련해 현재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가해자에 대한 형사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는 것과 동시에 치료비는 물론 위자료까지 피해자에게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의 ‘소송촉진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입법도 추진하고 있다.

범죄 피해자들이 정신적 충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정부가 이들에 대한 심리치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법무부 인권과 관계자는 “아직 한계가 있긴 하지만 범죄피해자를 돕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며 “내년도 범죄피해자 지원 예산을 올해의 4배 수준인 19억 원으로 증액하는 등 대책을 다각도로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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