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사이 ‘팬픽’ 바람…‘오빠의 사랑얘기’에 열광

  • 입력 2005년 10월 15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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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내가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영생은 현중을 끌어안았다. 현중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영생은 손가락으로 현중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아픈 사랑은 더 이상 하기 싫어.

나 너무 힘들어.” 현중은 영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가을비련’ 중) 초등학교 6학년 김희영(가명·12) 양은 최근 단편소설 ‘가을비련’을 쓰고 있다. 내용은 남성 5인조 아이돌 그룹 ‘SS501’의 멤버 김현중(19)과 허영생(19)의 사랑 이야기.

김 양은 “3개월 전 처음 소설을 썼고 지금은 같은 반 친구 5명과 함께 각자의 소설을 돌려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양의 목표는 좀 더 드라마틱한 동성애 소설을 써서 인터넷 스타 작가가 되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이규연(가명·13) 양은 ‘SS501’ 팬픽 카페에서 이미 유명 인물이다. 이 양은 허영생-김현중 커플에 여자 연예인을 등장시켜 동성과 이성의 삼각관계를 그린다. 이 양은 “오빠들 사이에 등장하는 여자 연예인이 인기 없거나 한물간 스타면 아이들이 무시한다”고 말했다.

‘팬들이 쓰는 소설’을 뜻하는 ‘팬픽(Fanfic)’이 2005년 부활하고 있다. 1997년 그룹 ‘H.O.T.’와 ‘젝스키스’, 2000년 ‘신화’, ‘god’에 이어 2005년에는 남성 보컬그룹 ‘동방신기’와 ‘SS501’이 팬픽 열풍의 근원이다. 현재 ‘동방신기’의 팬픽 사이트는 30여 개. 이 중 ‘동방신기 팬픽 넘버 원’ 사이트의 회원은 11만 명이 넘는다.

○ 新팬픽 문화

2005년 신(新)팬픽 문화의 특징은 ‘초딩(초등학생)’이 주류라는 점이다. 팬픽 1기로 분류되는 ‘H.O.T.’와 ‘젝스키스’ 시절에는 10대 여고생이, 팬픽 2기인 ‘신화’와 ‘god’가 인기 있던 시절에는 여중생들이 팬픽의 주 소비층이자 생산층이었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 신동초등학교 김세화(25·여) 교사는 “팬픽은 스타의 사생활을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아이들이 열광한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코드는 ‘동성애’다. ‘동방신기’의 경우 ‘유수’(믹키유천-시아준수 커플), ‘윤재’(유노윤호-영웅재중 커플), ‘SS501’은 ‘현생’(김현중-허영생 커플) 등의 약어를 써서 가공의 커플을 만들어낸다. ‘동방신기 팬픽 넘버 원’의 경우 10만여 건의 소설 중 6만 건 이상이 동성애를 다룬 팬픽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동방신기’의 멤버 유노윤호(19)는 “팬들의 관심으로 보고는 있지만 때론 황당하다”고 말했다.

○ 성 가치관의 혼돈? ‘팬덤’의 극대화?

문화평론가들은 신팬픽 문화에 대해 대중문화의 소비 주체가 ‘하이틴’에서 ‘로틴’으로 이동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초등학생들이 TV 인터넷 등의 매체에 친숙하기 때문에 창작자로 나서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동성애’ 표현에 대해서는 △주 생산자인 소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다른 여성에게서 격리하고 싶은 욕구의 반영 △소설에 등장하는 동성 멤버를 자신과 동일시 △스타의 사생활, 심리 등을 자신이 조작할 수 있다는 쾌감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성균관대 의대 홍성도(60·소아청소년 정신과) 교수는 “글쓰기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예민한 성장기에 판타지 동성애 소설에 자주 노출될 경우 성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43) 교수는 “동성 팬픽을 즐기는 10대들은 대부분 허구임을 알고 있다”며 동성애 조장 염려를 일축했다. 황 교수는 “팬픽 문화는 ‘팬덤(fandom·특정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문화현상)의 극대화일 뿐이므로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올바르게 지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팬픽(Fanfic)이란?:

팬(Fan)과 픽션(Fiction)의 합성어로 ‘팬들이 쓰는 소설’이란 뜻. 아마추어 팬들이 영화나 드라마, 또는 책을 본 후 이를 토대로 글을 쓰는 자신만의 ‘속편’이다. 지난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정식 등재됐다. 해외의 경우 TV 시리즈 ‘엑스 파일’이나 ‘스타 트랙’ 등을 본 후 시청자들이 직접 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곤 했다. 일본의 경우는 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한 팬픽이 많으며 ‘스맙’, ‘킨키 키즈’ 등의 아이돌 스타들을 등장시킨 스타 팬픽도 10대 소녀들 사이에 인기다. 한국의 경우 스타 팬픽이 주류다.


1997년 ‘H.O.T.’와 ‘젝스키스’, 2000년 ‘신화’와 ‘god’에 이어 ‘동방신기’(아래)와 ‘SS501’(위)이 2005년 팬픽 붐의 새로운 진원지가 됐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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