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논란 이중섭-박수근 그림 58점 모두 위작 판정

  • 입력 2005년 10월 8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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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미술계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이중섭, 박수근 화백의 작품으로 여겨져 온 그림들이 무더기로 가짜 판정을 받음에 따라 미술계는 물론 문화예술계, 그림시장 등이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림 감정 어떻게 했나=검찰의 감정은 전문가의 안목 감정, 종이 제작연도 측정, 필적 감정 등 세 갈래로 이뤄졌다.

안목 감정에는 대학교수, 전현직 국립현대미술관장, 화랑 사장 등 감정위원으로 위촉된 16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각자 그림을 보고 그 결과를 검찰에 문서로 통보하는 식으로 감정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줄까봐 서로 누가 감정인이 됐는지 당사자들도 모르게 진행됐다. 그 결과 모두 위작 판정을 내렸다.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은 58점의 그림 중 3점을 표본으로 추출해 작품 종이에 함유된 방사성 탄소량 비교를 통해 종이 제작연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박수근의 그림이라고 주장된 ‘머리에 짐을 이고 있는 여인’의 종이 제작연도가 일러야 1957년으로 추정됐으나 그림에는 1954년 작이라고 표시돼 위작으로 의심된다는 감정결과를 검찰에 통보했다.

서명 필적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판정이 가능한 56점 모두 서명을 진품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정했다. 감정 대상 그림의 대부분이 연필로 강하게 기재된 필적의 자획을 따라 덧그려 불균형한 굴곡이 많을 뿐 아니라 서명 시필(始筆) 부분과 종필(終筆) 부분이 부자연스럽고 곡획과 굵기가 불균형한 특징을 보였다는 것이다.

▽위작 유형=검찰이 그림들을 사진 촬영해 유형별로 분석한 결과 절반가량은 원화를 그대로 베끼고 절반가량은 원화의 일부 이미지만을 확대 발췌해 독립적인 그림으로 만든 것으로 나타났다. 미술계 관계자는 “보통 원화를 베끼는 게 일반적인 위조방식인데 원화 일부만 모사해 그리는 것은 전례가 없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 점에서 미술계는 위작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조직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더구나 위작의 형태가 이중섭, 박수근 작품에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었으며, 똑같은 이미지의 그림이 10점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검찰은 그림 뒷면에 조명을 비추고 촬영해 보니 일부 그림 중에는 눌러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심지어 서명부분도 눌러쓴 흔적이 역력해 원본을 일단 연필로 모사한 후 채색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밝혔다.

▽이중섭 유족 반응=이중섭의 차남 태성 씨는 검찰 발표 후 본보에 e메일을 보내 “유족은 이번 검찰 발표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검찰은 위작이라고 판단한 모든 과학감정의 절차와 과정, 감정위원들의 명단 및 판단 근거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이 씨는 “유족은 아버지의 명예가 더럽혀진 것에 대해 깊이 상처를 받고 있다”며 “1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이 억울함을 꼭 밝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동안 이 씨의 태도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처음에는 소장품이 20∼30점에 불과하다고 했다가 김용수(金鏞秀·한국고서연구회 명예회장 겸 이중섭 미발표작 전시준비위원장) 씨를 만난 이후 150점을 갖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이 씨는 김 씨로부터 그림을 받았다는 미술품감정협회의 주장을 극구 부인해 왔으나 검찰조사 결과 올해 4월 이 씨가 ‘50년간 소장했다’며 언론에 공개한 작품 가운데 3점은 김 씨의 소장품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유족과 김 씨 측은 중간에 전시를 기획하며 중재 역할을 한 일본인 마크 하토리 씨가 유족의 일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작품이 섞이게 되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아버지 작품을 어릴 적부터 보아서 자신보다 더 이중섭 그림을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던 이 씨가 어떻게 남의 작품을 자신의 소장품으로 전시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밝혔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내가 산 그림도 혹시…” 소장자 항의 빗발▼

미술계는 ‘이중섭 그림 위작 파문’이 불거진 지 6개월 만에 나온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로 뒤숭숭한 분위기다. 특히 경매회사가 경매에 부쳐 낙찰됐던 작품 4점까지 위작 판정을 받음에 따라 미술계에 미칠 파장이 크다는 분석이다.

최근까지 국내 유일한 경매회사였던 ㈜서울옥션 이호재 대표가 7일 책임을 통감하고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지만 미술계 관계자들은 이번 일로 생긴 미술 시장에 대한 불신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며 침통해 했다.

20여 년 동안 화랑을 경영해 온 한 중견 화랑 주인은 “그렇지 않아도 경기불황에 허덕이는데, 이번 사건으로 어떻게 그림을 믿고 살 수 있겠느냐는 컬렉터들의 항의로 얼굴을 못 들 지경”이라고 전했다.

미술계에선 차제에 공인된 감정기관 설립은 물론 미술시장의 사기(詐欺) 행위와 유통 난맥을 바로잡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수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 김헌정 부장은 “현재 국내에서 미술품 감정은 3개의 비영리 사단법인에서 주로 하고 있는데 이해관계에 따라 작품 진위 해석 및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있어 공신력 있는 기관은 하나도 없는 셈”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등 선진국은 정부가 인증하는 자격고시를 통과한 전문 경매사나 감정사협회가 미술품을 평가하고 보증서를 발급하게 해 위작 논란을 사전에 방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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