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lish Divide영어 격차]<上>사회적 지위의 잣대로

  • 입력 2005년 10월 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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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빈부 격차가 자녀의 영어 실력 차이를 낳고, 영어 실력 차이가 다시 빈부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는 이른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영어 격차)’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재력을 바탕으로 한 영어 실력 키우기가 자녀들의 장래 사회적 지위와 부를 결정짓는 핵심 잣대로 떠오르고 있는 것. 하지만 현실적으로 영어 공부는 거의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겨져 있다. 한국 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잉글리시 디바이드를 집중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해 본다.》

▽영어 격차에 따른 빈부의 대물림=중국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과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의 국제학교에는 한국 학생 대기자가 적게는 40명, 많게는 320명에 이른다. 대부분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빈자리가 나면 언제든지 유학을 떠날 준비가 돼 있는 학생이다. 1년에 약 4만 달러(약 4100만 원)가 들어가지만 영어 공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돈을 쓰겠다는 게 부모들의 뜻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저소득 계층에는 적어도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들어가는 값비싼 영어 사교육은 ‘그림의 떡’이다.

한국은행은 올 3월 열린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제출한 한국인의 소비구조 변화 보고서에서 “소득 상위계층의 교육비 지출이 하위계층보다 더욱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면서 “현 세대의 소득 격차가 교육 투자의 차이로 이어져 계층 간 소득 격차가 대(代)를 이어 고착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서 거액이 들어가는 사교육비 지출의 핵심은 영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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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육인적자원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올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30일 이상 해외에서 어학연수를 한 초중고교생은 모두 7481명. 이 가운데 서울지역 학생이 2640명으로 전체의 35.3%를 차지했다. 특히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 학생만 796명으로 광주와 전남북을 다 합친 372명의 2배를 넘었다.

베스트셀러 ‘10년 후 한국’의 저자인 공병호(孔柄淏) 박사는 “영어는 국가경쟁력과 직결되면서도 사회 내부적으로 신분을 세습하고 불평등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있다”며 “한국의 영어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개인 책임으로 방치돼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한국 국민이 영어와 관련해 쏟아 부은 돈은 천문학적이다.

한국은행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에 집중된 해외 유학·연수비가 약 7조3800억 원(동반 가족 생활비 등 포함)이었고 토익 토플 응시료로 지출한 비용이 684억 원이었다. ▽영어에 울고, 웃는 사회=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이 자식들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리는 것은 영어를 잘하면 얼마나 큰 혜택이 있는지를 직간접적으로 실감했기 때문.

지난해 소유주가 미국계 자본으로 바뀐 A사 김모(42) 차장은 최근 밤잠을 설쳤다. 한 달 동안 갖은 고생 끝에 마케팅 전략에 대한 기획안을 만들었지만 정작 경영진 앞에서 하는 프레젠테이션은 부하 직원이 한 것.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영어가 유창한 사원이 승진 심사나 해외 근무자 선발 때 우선시되며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다른 외국계 기업으로 옮기는 사례는 이미 구문이 된 지 오래다.

올해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 송모(35·여) 씨는 국내 대형 로펌(법률회사)들로부터 잇단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송 씨가 영어 동시통역사 자격증을 갖고 있기 때문. 외국 기업과 관련된 특허분쟁에서 송 씨가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L그룹의 인사 담당 임원은 “대기업일수록, 젊은 층이 선호하는 분야일수록 영어 실력이 승진과 보직 이동에 결정적인 잣대로 작용하는 추세”라며 “그래서 직원들이 기를 쓰고 영어 공부를 하고, 영어에 한 맺힌 직원들이 자녀의 영어 교육에 매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이성주 기자 stein33@donga.com

■ 영어교육 정부대책은

정부도 뒤늦게 ‘영어교육 활성화 5개년 종합대책’을 수립하는 등 공교육을 활성화해 잉글리시 디바이드의 간극을 메우려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사교육 시장을 뒤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대다수 교육 전문가의 견해다.

정부는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영어교육에 대해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1997년 초등학교 3학년에 영어 교과를 도입하면서 우리 영어 공교육에 전기를 마련했다.

2001년엔 서울시교육청이 ‘정보화 의사소통 능력 향상을 위한 영어교육 4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시교육청은 모두 200여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영어로 진행하는 영어수업 활성화 △효과 있는 영어교사 연수의 도입 △새 교재 개발 △초중학교 영어체험캠프 운영 △원어민 강사 초빙 제도 등을 도입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올 5월 ‘영어교육 활성화 5개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교육부는 △수준별 수업 및 교과서 도입 △의사소통 능력 향상을 위한 강의 방법과 평가 방법 개선 △영어교사 양성 선발 및 연수 체제 개선 등 더 진전된 내용을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서민층 자녀가 영어를 쉽게 배우도록 하는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2004년 경기도가 경기영어마을 안산캠프, 올해 서울시가 영어체험마을을 설립했고 부산 인천 대구 충남 등 대부분의 지자체가 영어체험마을을 만들 계획이다. 이들 지자체에서는 방학 때 각종 영어캠프를 운영해 서민층 자녀가 영어를 가까이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학생들의 영어 실력 격차를 해소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라는 반응이다.

전문가들은 공교육에서 영어를 더 일찍 가르치고 수업 시간을 늘려야 사교육 시장이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교육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인이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려면 2400∼2760시간, 중급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려면 1320시간 영어를 배워야 하지만 현재 한국 초등 3년∼고교 3년의 영어 교과 수업은 총 782시간으로 여기에 턱없이 모자란다.

영어와 같은 어족인 스웨덴에서도 초등학교의 3분의 1이 1학년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는 등 세계 각국이 더 빨리 영어를 가르치는 방법을 도입하고 있지만 한국은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교육부의 관계자는 “최소한의 예산을 확보하는 것조차 어렵다”며 “일부 정치권 및 시민단체에서 ‘조기 영어교육은 아이의 민족적 자긍심을 훼손하는 등 부작용이 크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성주 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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