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땅 없는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

  • 입력 2005년 8월 5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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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의료 관광 등 ‘고(高)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이끌어 갈 중요한 성장 동력으로 꼽힌다. 제조업 중심 성장 전략만으로는 벽에 부딪힌 상황이어서 이런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60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2005년 세계 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의 의료는 48위, 고등교육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학 교육의 사회 요구 부합 정도’는 52위에 그쳤다. 사실상 국제 경쟁력이 ‘낙제점’이란 뜻이다. 고급 서비스업의 낙후된 경쟁력은 사상 최대 서비스수지 적자로 나타났다.》

○ 경쟁력 떨어지는 교육, 관광 서비스

해외로 자녀를 유학 보낸 부모나 해외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교육 및 관광 서비스의 ‘비용 대비 만족도’가 해외에 비해 현저히 낮다고 지적한다. 3년 전 고교 3학년생 딸을 미국 동부의 사립 고등학교로 유학 보낸 대기업 임원 정모(48) 씨는 1년에 3000만 원의 학비를 댄다.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 받은 한국 교육은 아이의 능력을 살려 주지 못했다”면서 “학비가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의 질이 높아 대단히 만족한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손세원(孫世遠) 경영조사팀장은 “한국의 교육서비스는 수십 년간 평준화에 묶여 ‘경쟁체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면서 “수요자의 요구 수준이 계속 높아지는 만큼 그에 맞춘 과감한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비스 산업의 가격 경쟁력마저 떨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 중장년 남성층을 중심으로 급증하는 ‘해외 골프여행’이 대표적이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회원제 18홀 골프장을 비(非)회원이 이용하려면 8월 현재 주중 평균 22만7000원, 주말 평균 26만2000원이 든다.

이에 비해 중국 하이난(海南) 섬에서 4박 5일간 총 90홀의 골프투어는 78만 원. 해외여행이라는 ‘프리미엄’을 빼고 보더라도 하이난 섬의 홀당 이용료(8666원)는 한국 수도권의 주말 이용료(1만4555원)뿐 아니라 주중 이용료(1만2611원)보다 싸다.

○ 환자의 불신 사는 의료 서비스

경기 용인시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김모(54) 씨는 2003년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전립샘(전립선) 암(癌) 판정을 받았다. 심한 두려움 속에서 치료를 시작하려던 김 씨는 방사선과 의사가 “암인가요, 아니면 비대증인가요”라고 묻는 것을 듣고 미국행을 결심했다.

미국의 유명 대학병원에서 만난 의사는 태도부터 달랐다. 출국 전 한국에서 보낸 진료기록과 검사 결과를 꼼꼼히 점검한 미국인 의사는 3가지 치료 방법을 제시하며 각각의 장단점을 소개했다. “만약 제 가족이 같은 병에 걸렸다면 3가지 방법 중 1번을 선택하겠다”는 의사의 말에 김 씨는 흔쾌히 동의했고 얼마 후 병이 호전돼 귀국했다.

해외 의료기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진료를 주선하는 ‘캔서 에이드’의 구본채(具本彩) 이사는 “몇 년 전까지 해외 치료는 고위층 또는 부유층이 ‘몰래’ 이용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요즘은 중산층의 문의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의료 분야에 팽배해 있는 평등주의가 결과적으로 서비스의 ‘하향 평준화’를 낳고 이에 불만을 느낀 환자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서비스 경쟁력 강화 더딘 걸음

보건복지부는 최근 “(의료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의료기관의 영리법인 허용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사회단체는 “영리 의료법인 허용이 공공보험 체계를 흔들고 의료 서비스의 빈부 격차만 늘릴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는 지난해 캐나다의 초중고등 교육기관을 제주시내에 2008년까지 유치하기로 양해각서를 맺었다. 하지만 5월 통과된 ‘경제자유구역 및 제주국제자유도시 외국교육기관 설립, 운영에 관한 특별법’은 제주지역에 대학 설립만 허용하고 있어 유치 추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高精敏) 수석연구원은 “해외에서 이뤄지는 고급 소비를 국내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교육, 의료, 관광 분야에서의 과감한 개방과 규제 완화를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다양한 상품 개발로 소비자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서비스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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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완 기자 cha@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평등’ 앞세운 의료시스템▼

국내 고급 의료서비스는 진료보다는 건강검진에 치중돼 있다.

현행 건강보험제도가 공공성을 이유로 ‘진료 차별화’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병원들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건강검진을 통해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스타타워빌딩에 입주한 서울대병원 강남건강검진센터는 프리미엄 건강검진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본적인 검사 외에 전신 컴퓨터단층촬영(CT),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자기공명영상(MRI)촬영 등을 통해 주요 암(癌)이나 장기별 질환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다.

검사비는 검사항목을 얼마나 추가하느냐에 따라 50만∼390만 원으로 다양하다.

연세의료원과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도 비슷한 건강검진 서비스를 하고 있다.

건강검진 외에 프리미엄 서비스라고 할 만한 것으로는 특급호텔 수준의 인테리어를 갖춘 특실을 들 수 있다. 연세의료원 신촌세브란스병원은 최근 새로 지은 병동에 하루 사용료가 170만 원인 ‘VIP 병실’을 마련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건강검진을 제외한 의료 분야에서 ‘프리미엄 진료’를 찾기는 힘들다.

A종합병원 관계자는 “VIP 환자에 대해서는 고객관리 차원에서 좀 더 세심한 배려를 하는 정도”라며 “고급 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많지만 안타깝게도 국내 진료서비스는 하향 평준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고급 의료서비스를 받으려면 해외로 나간다는 것이다.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조흥은행 프라이빗뱅킹(PB) 센터는 해외 의료정보 컨설팅업체와 제휴해 외국 유명 병원의 프리미엄 진료서비스를 소개해 주고 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경쟁력 떨어지는 교육▼

경기 성남시 분당신도시에 사는 회사원 강모(47) 씨는 최근 1년간 캐나다 중부에 있는 A사립고교 1학년생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약 2000만 원을 썼다. 연간 등록금 1250만 원에 비행기 값, 용돈, 여름방학 여행 경비 등을 합친 액수다.

그는 학교와 학원을 다람쥐처럼 오가는 빡빡한 일정에 아이가 너무 고통스러워 해 유학을 보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강 씨는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매일 밤 12시까지 학원 강의를 들으며 선행학습을 했다”면서 “한국에서는 대충 가르치는 경우가 많아 학원을 다니지 않으면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캐나다 A고교 등록금에는 기숙사비와 교과서, 부교재비, 서클 활동비에 식비까지 포함돼 있는 데다 학교에서 각종 스포츠도 즐길 수 있다.

강 씨는 “캐나다 교사들이 학생 개개인을 꼼꼼하게 지도해 주는 데다 수업이 토론과 연구 중심으로 깊이 있게 진행돼 만족스럽다”며 “솔직히 연간 2000만 원의 비용이 크게 아깝지 않다”고 했다.

한국의 사립고교 가운데 학교 수업에 대한 의존도가 비교적 높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얼마나 들까.

한국외국어대 부속 외국어고 1학년생 아들을 둔 회사원 김모(46·경기 성남시 분당구) 씨는 분기별 등록금 110만 원에 월별 기숙사비로 70만 원을 낸다. 한 학기 동안 교재 및 문제지 구입, 용돈 등으로 150만 원가량 들었다. 이 학교 학생 상당수는 여름방학 때 해외 봉사활동을 떠나는데 김 씨는 여기에 200만 원을 썼다.

김 씨는 “연간 1600만 원 정도 드는 셈인데 사교육을 따로 받을 필요가 없어 일반고교에 다니면서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는 학생에 비하면 그나마 적게 드는 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학교가 적은 데다 입학하기도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모자라는 상황. 그래서 학부모들은 자녀를 해외로 내보낸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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