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하는 법’ ‘귀기울이는 법’ 法의 두 얼굴

  • 입력 2005년 7월 11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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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소복을 입고 3년 째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종말 씨. 김 씨는 “증권회사에 다니던 아들이 사내 왕따로 고통받다 자살을 기도한 뒤 실명했다”며 “아들의 사고도 서럽지만 검찰이 내 말을 안 들어 주는 것이 더 서럽다”고 말한다. 신원건 기자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소복을 입고 3년 째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종말 씨. 김 씨는 “증권회사에 다니던 아들이 사내 왕따로 고통받다 자살을 기도한 뒤 실명했다”며 “아들의 사고도 서럽지만 검찰이 내 말을 안 들어 주는 것이 더 서럽다”고 말한다. 신원건 기자
《사람은 귀는 두 개고 입은 하나다. 남의 말은 많이 듣고 자신의 말은 적게 하라는 뜻으로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최근 “새 검찰총장을 상징하는 말로 ‘국민의 소리를 경청한다’는 의미에서 ‘귀가 큰 총장’으로 붙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지금 서초동 법조의 귀는 얼마나 클까. 서초동을 드나드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말을 외면하는 법과 말을 들어 주는 법의 두 모습을 살펴본다.》

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 앞. 경남 진주시가 고향인 김종말(65·여) 씨가 빗속에서 소복 차림으로 혼자 시위를 하고 있었다. 지난해 8월 이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김 씨 아들은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들어갔다가 2002년 식물인간이 됐다. 회사에서 ‘왕따’에 시달리다 자살을 시도해 그렇게 됐다.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는 아들 회사 앞에서 그는 2년 넘게 시위를 했다.

아들 회사는 김 씨를 업무방해 등 혐의로 고소했고 김 씨는 이 회사 직원들을 폭행 혐의로 맞고소했다.

김 씨는 검찰이 자신만 재판에 넘기는 등 편파 수사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8월부터 대검 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검찰의 ‘높은 분’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지만 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국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가 있던 날. 검찰 직원이 “면담을 주선하겠다”며 처음 수사를 맡은 서울남부지검으로 가 보라고 했다.

그곳에서 6시간이나 기다렸지만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돌아와 보니 국정감사가 끝난 뒤였다. 김 씨는 “국회의원들에게 시위 장면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나를 빼돌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씨는 아들의 불행도 가슴 아프지만 검찰이 자신의 얘기를 제대로 들어 주지 않는 게 더 서럽다고 했다.

김 씨가 시위하는 대검 청사의 길 건너편 서울중앙지검 청사 후문. 경북 칠곡군이 고향인 정성원(57) 씨도 하루를 이곳에서 시작한다. 잠은 근처 지하상가나 공원에서 잔다. 3년 넘게 똑같은 생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귀를 몸에 두른 채 그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시위하는 사연도 같다. 검찰청사 앞에서 한 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그는 지난해에는 검사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플래카드에 검사의 이름을 적어 시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정신병원에 1개월 동안 갇혀 지내기도 했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나자마자 그는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좀 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검찰 관계자도 “면담으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그냥 놔뒀겠나”라며 “직원들을 시켜 알아보았지만 억지스러운 주장이 많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적어도 한 가지는 똑같이 말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들어가지만 나에게 사연을 물어 보거나 내 말 한번 제대로 들어 주는 판사 검사 변호사는 없었다”고.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작은 관심에 답답함 눈녹듯”

“이렇게 말을 잘 들어 주시는 판사님이라면 재판에 져도 좋습니다.”

서울행정법원의 A 부장판사가 지난달 중순 자신이 맡고 있던 사건 당사자인 이모(63)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A 판사가 이 씨를 만난 것은 자신에게서 재판을 받던 이 씨가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받게 해 달라”며 재판부기피신청을 냈기 때문.

당사자가 기피신청을 내면 법원은 통상적으로 기피신청이 적절한지, 신청을 받아들일지에 대한 법적 판단만 한다. 기피를 당한 판사가 당사자와 이야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

A 판사는 ‘혹시 내가 재판 중에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면 고쳐야겠다’는 생각에 이 씨를 직접 만나 보기로 했다.

그는 이 씨를 만나자마자 “우리 재판부에서 재판받지 않아도 좋고 어떤 이야기도 판결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일러 준 뒤 얘기를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판사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주지 않고 서류만 가지고 딱딱하게 재판을 한다는 것.

A 판사는 “재판이라는 것이 억울한 일을 상담하는 것과는 달리 딱딱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씨가 살아 온 이야기, 변호사도 없이 혼자서 소송하는 사연까지 다 들어 주었다.

이 씨는 “판사가 이야기를 들어 보자고 불러 줬던 것만으로도 서운한 게 다 풀렸다”고 말했다. 그는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렸기 때문에 재판에 지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며 “판사를 만나고 나와 바로 기피신청을 취소했다”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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