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통에 비친 2004… “그래도 이웃은 따뜻했다”

  • 입력 2004년 12월 30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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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본보 사회면의 한 모서리를 장식하는 ‘휴지통’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작은 창이다. 84년의 연륜을 쌓아온 휴지통은 본보뿐 아니라 국내 언론 사상 최장수 고정란으로 본보 창간 열흘째인 1920년 4월 10일 탄생했다. 당시는 3·1운동의 함성이 채 가시지 않던 시점. 첫 호는 부임 후 조선말을 공부한다는 총독부 정무총감에게 “만세라는 말이 어떠한 말인지 특히 궁리하는 게 긴급한 일…”이라며 따끔하게 충고했다. 200자 원고지 한 장 반이 채 안되는 짧은 기사지만 우리 이웃의 모습과 애환을 가감 없이 지켜봐 온 휴지통은 신년호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심판,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 어려운 경제상황 등 굵직한 사안들이 지면을 온통 메웠던 2004년. 휴지통은 이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올 한 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담아냈을까.

2004년 초기, 대통령 탄핵심판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은 정치 및 사회상황은 휴지통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격분한 한 시민이 정신적 피해를 보았다며 정치인들에게 1원씩의 손해배상 소송과 함께 ‘국민의 뜻에 따라’라는 말에 대한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사건이 있었고(3월 18일자), 전남의 한 시민단체는 탄핵을 주도한 야당 대표들에게 깨끗이 닦고 새로운 마음으로 정치를 시작하라며 세탁비누 10개씩을 보낸 일도 있었다(3월 15일자).

혼란스러운 정치보다 더 국민을 아프게 했던 것은 경기침체였다. 한 노숙자는 살기 힘드니 감옥에라도 들어가야겠다며 경찰서에 세워둔 포돌이 간판을 일부러 발로 차 부쉈고(2월 3일자), 한 40대 남성은 빚과 생활비에 쪼들려 20년 사귄 친구의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2월 5일자).

2004년 전반기 내내 힘들어하는 국민에게 그나마 작은 기쁨을 준 것은 올림픽에서 한국축구가 8강에 올라간 것이었다. 한 60대 도둑은 밤늦게 빈집에 들어갔다가 올림픽 축구 한국-파라과이의 중계방송을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이 드는 바람에 경찰에 붙잡히는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8월 24일자).

올림픽의 열기도 잠시.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여파는 뜨거운 여름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당시 한 주점에서는 “눈매가 유영철을 닮았다”고 놀린 것에 격분해 동료를 폭행한 사건도 발생했다(8월 28일자).

후반기에도 무거운 소식이 휴지통을 메웠다. 특히 국가보안법 존폐 논란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논란이 한창이던 때 주택가에서 북이 그려지고 “난 이 북이 좋아요”라고 적힌 전단이 발견되기도 했고(9월 15일자), 술에 취해 “김정일 만세”를 외친 일용직 노동자가 국보법 위반으로 입건되는 일도 있었다(9월 10일자).

우울한 정치, 악화된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을 우쭐하게 만든 일이 ‘한류 열풍’이다. ‘겨울연가’와 ‘용사마’로 대표되는 한류 열풍은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시켰고 우리 대중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겨울연가’와 그 촬영지인 강원 춘천시에 깊은 애정을 표시하며 춘천 방문이 이뤄지길 진심으로 기원한다는 뜻을 춘천 시민에게 전달하기도 했다(8월 11일자).

한국영화도 안팎에서 크게 성장했다. 그래서일까. 영화 같은 사건도 잇따랐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의 아들에게서 압수한 금괴를 싸게 팔겠다고 속여 돈을 가로챈 할리우드 영화 같은 사기사건이 있었고(2월 27일자), 한 40대 남자가 경기 평택시 주유소에서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을 흉내 내 라이터를 들고 “주유소를 폭파하겠다”며 난동을 부린 일도 있었다(5월 20일자).

이웃들의 따스함은 올해에도 1년 내내 이어졌다. 택시강도에게 돈을 빼앗긴 택시운전사가 범인을 추적해 붙잡았지만 범인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을 보고 오히려 돈을 준 사건이 있었고(1월 12일자), 한 신용불량자가 백혈병에 걸린 아내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움을 호소하는 e메일을 보내자 수많은 누리꾼(네티즌)들이 성금을 모아 보내준 사례도 있었다(3월 10일자). 전역을 앞둔 의경이 주차장에서 거액이 든 손가방을 발견하고도 욕심 부리지 않고 바로 주인에게 되돌려 준 미담도 있었다(11월 17일자).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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