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 냉가슴…“숙박 금지하면 20만~30만명 잠자리 어쩌라고”

  • 입력 2004년 12월 7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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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면서 잠도 잘 수 있는 게 고시원의 장점인데 침대를 치우고 독서실처럼 밤에 문을 잠그면 누가 고시원을 이용하겠습니까. 아예 문 닫으라는 얘기죠.” 6일 서울 관악구 신림2동에서 만난 고시원 업주 정모 씨(40)는 고시원을 다른 시설로 업종 전환하라는 정부의 대책을 대뜸 ‘탁상행정’이라고 성토했다. 또 강남구 역삼동에서 J 고시원을 운영하는 박모 씨(55)는 “건물을 지을 때 소방서와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점검한 뒤 영업해도 좋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고시원 영업이 불법이라니 말이 됩니까”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국에 걸쳐 고시생과 대학생 등 20만∼30만 명이 이용하고 있는 고시원이 ‘고사(枯死) 위기’에 처했다. 정부가 화재 등 사고를 우려해 현행 고시원을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독서실이나 숙박업소로 업종을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고시원 업주들은 “현실을 도외시한 정부 대책 때문에 대부분의 고시원이 문을 닫아야 할 처지”라고 반발하고 있다.

▽정부 대책=보건복지부는 4월 영업 중인 고시원 가운데 주거지역에 있는 것은 독서실로 바꾸고, 상업지역에 있는 것은 숙박업으로 등록해 운영하도록 하는 고시원 관리대책을 마련했다.

즉 공부와 숙박을 함께할 수 있는 현행 고시원을 공부와 숙박 가운데 하나만 가능한 업소로 바꾸겠다는 것. 복지부는 1년 동안의 계도기간을 거쳐 내년 4월부터 일제 단속에 들어갈 계획이다.

정부의 이 같은 대책은 1월 경기 수원시의 한 고시원에서 불이 나 4명이 숨진 참사가 발생해 고시원의 안전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됨에 따라 마련됐다.

당시 대형 사무실을 ‘벌집방’ 형태로 개조한 많은 고시원의 경우 불이 옆방으로 옮겨 붙기 쉬운 데다 비상벨이나 유도등, 가스누설경보기, 방화문 등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안전시설이 없는 곳이 많다는 점이 지적됐다.

▽반발=고시원 업주들은 안전을 강화하라는 정부의 취지는 인정하지만 고시원을 독서실이나 숙박업소로 바꾸라는 것은 현실을 도외시한 대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업지역에 있는 고시원은 숙박업으로 바꾸고 싶어도 학교와의 거리, 주차장 규모 등 숙박업 허가기준을 맞출 수 있는 곳이 전체의 1%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고시원이 여관 등 일반 숙박업소와는 달리 학교와 가까운 곳 등에 있기 때문.

또 전체의 95%를 차지하는 주거지역 고시원의 경우 ‘잠을 자기 위한 시설’을 설치할 수 없는 독서실로 바꿀 경우 이용객이 없어질 것이라고 업주들은 말한다. 손남식(孫南植) 신림동고시원발전대책위원장은 “정부가 법규에 ‘고시원’이라는 업종을 신설해 안전 관리를 강화하도록 하면 될 텐데 굳이 현실에 맞지 않는 다른 업종으로의 전환을 강요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강창우(姜昶宇) 한국고시원협회장도 “고시원이 없어지면 상당수 가난한 대학생과 수험생, 도시빈민들은 당장 잠잘 곳을 잃고 거리로 나앉아야 할 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 질병정책과 오운성(吳雲成) 사무관은 “업주들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보완책을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고시원 실태▼

1980년대 중반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주변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고시원은 그 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현재 전국적으로 1만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용자는 20만∼30만 명.

관악구 신림 2, 9동은 ‘고시원의 메카’로 불리는 곳. 고시원 건물만 600동이 넘으며 전체 주택의 80%가 고시원이다. 2만 명으로 추산되는 고시원 이용자 가운데 80∼90%는 사법시험 및 행정·외무고시 준비생들이다. 나머지도 일부 대학생을 제외하면 7, 9급 공무원시험이나 세무사 등 다른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다. 한마디로 고시촌인 셈.

그러나 다른 지역의 고시원들은 성격이 다소 다르다. 숙박이 주목적인 일반인과 공부가 주목적인 대학생·수험생의 비율이 반반 정도인 곳이 대부분이다. 특히 서울 도봉구 창동, 동작구 신대방동 등 지하철역 부근의 고시원은 일용직 노동자 등 극빈자들이 많이 이용한다.

고시원의 방 크기는 3m2에서 15m2까지 다양한 편으로 2∼5평 규모. 기본적으로 책상과 침대, 소형 냉장고, TV, 에어컨 등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취사와 세탁은 대부분 공동시설에서 하도록 돼 있다.

방값은 월 18만∼35만 원. 개인 화장실과 샤워실, 주차장이 있는 고시원은 40만 원이 넘는다.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회사원 장모 씨(29)는 “일반 전셋집과 달리 보증금이 필요 없는 데다 숙박비가 싸고 생활비가 적게 들어 좋다”고 말했다.

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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