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다 먼저”… “남들이 하니”… 선행학습 악순환

  • 입력 2004년 11월 29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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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김모씨(43)는 지난해 초등학교 2학년인 딸과 서울 강남의 A학원을 찾았다가 충격을 받았다. 6세 때부터 이 학원을 다녔다는 동갑내기 아이가 중학교 2학년 과정의 수학문제를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하도 불안해 아이를 이 학원에 1년간 보낸 끝에 한 수학경시대회에서 금상을 탈 수 있었다”며 “앞서가는 사람을 보면 학부모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모씨(40)는 요즘 초등 2학년 아들을 영어학원에 계속 보내야할지 고민이다. 영어회화나 시키려고 했는데 학원에서는 ‘impeccable’ ‘bewildered’ 같은 어려운 단어를 외우라는 숙제가 많아 아이가 너무 힘들어했다.

학원측은 “토익 토플 준비를 해 달라는 부모들의 요구가 많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서울 강남과 목동 상계동, 경기 성남시 분당 등 사교육 수요가 많은 지역의 학원가는 요즘 선행학습 신입생을 모집하느라 한창이다. 아침마다 신문에 끼어들어오는 광고 전단지가 수십장이다.

학원들은 “외국어고, 과학고에 가려면 초등학교 3, 4학년부터 시작해도 늦다”거나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고1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한다”고 홍보하고 있다.

▽선행학습 실태·부작용=선행학습 열풍으로 사교육 의존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

서울 강남 D중 1학년 K교사는 “학기 초 영어시험 평균이 90점대였다”며 “쉬운 교과서는 도움이 안돼 아예 원서를 복사해 수업을 한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 Y중 P교사는 “학원 숙제 때문에 학교 숙제를 내주지 않는 교사도 많고, 숙제를 많이 내주면 학부모들이 불만을 터뜨린다”고 말했다. 서울 P초등학교는 6학년 교실마다 2, 3명이 고교 수학 참고서인 ‘수학의 정석’을 들고 다닌다. 담임 C교사는 “이런 아이들은 건성건성 공부해 수업태도가 안 좋고 막상 쉬운 수학문제를 틀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학원이 선행학습에 치중하는 바람에 학교 수업의 진도대로 가르치는 학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최근 한 외국어고에 합격한 S중 3학년 이모양(15)은 “정상 진도 과정은 하위권 학생들이 많아 수업 분위기가 좋지 않다”며 “상위권 학생들은 교과 과정보다 1년 반 앞선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선행학습 효과 있나=서울 강남 J중 2학년 H양은 한 수학학원에서 고1 과정의 수학을 배우고 있다. H양은 “선행학습 덕분에 중학교 입학 이후 수학은 늘 100점”이라며 “어차피 배울 내용을 미리 공부하면 학교 성적도 좋게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를 제외하면 선행학습의 효과가 대학 입학 때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서울 C고 K교사는 “중학교 때 고교과정을 미리 배워 경시대회 입상 경력이 화려하지만 고 2, 3 때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유재봉(兪在奉·교육학) 교수는 “선행학습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학교수업은 지겨워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중고교생 65% “선행학습 경험있다”▼

본보 교육팀이 서울 강남북의 4개 중학교 2학년 375명을 대상으로 선행학습 실태를 조사한 결과 65%(245명)가 학교 진도보다 6개월 이상 미리 공부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선행학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 63%, ‘반드시 필요하다’ 8% 등 학생 71%가 선행학습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 이유로는 △학교수업을 잘 이해할 수 있다(54%) △고입 혹은 대입준비에 필요(19%) △성적이 잘 나오기 때문(11%) △남들이 다 해 불안하다(9%) 등을 들었다.

‘어느 정도 앞서 배우는 게 적절한가’라는 질문에 한 학기가 69%로 가장 많았고 1년 21%, 2년 5% 등이었다.

그러나 선행학습 경험자의 59%는 선행학습으로 인해 학교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다고 대답했다.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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