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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9월 13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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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던 11일 오후 경북 김천시 봉산면 신동 속칭 봉계마을 뒷산. 바이올리니스트 손성호(孫星湖·81·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씨는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부모님 산소 앞에 섰다.
손씨는 묘 앞에서 가족들 이야기며 고향 마을 앞으로 고속철도가 다니는 이야기를 했다. 이달 6·26전쟁 유공자로 인정받은 증서도 앞에 놓았다.
그는 1967년부터 토요일마다 서울∼김천 250km를 오가며 부모님 산소를 돌보고 있다. 서울역에서 오전 8시20분 무궁화 열차를 타고 김천역에 오전 11시40분에 도착하는 생활을 한 주도 빼먹은 적이 없다고 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살기 시작한 40대 중반부터 37년째 산소를 찾는 동안 그도 이제 80대 노인으로 변했다.
“일주일 만에 산소를 찾아도 풀이 꽤 자라 가위로 손질을 해야 합니다. 날마다 찾아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늘 죄스럽지요.”
그는 “부모님이 땅속에서 제가 오는 줄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이렇게 하면 좋아하실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손씨는 산소에서 6∼7시간 머물며 세상 이야기도 들려주고 주변에 꽃나무를 심고 가꾸기도 한다. 묘 주변에는 그가 심은 연산홍 백일홍 목련 장미 같은 화초가 계절에 따라 꽃을 피운다. 2남3녀를 둔 그는 서울∼김천 차비를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는다. 지금도 어릴 적부터 손에 익은 바이올린을 학생들에게 집에서 가르치면서 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주중에는 지병으로 7년째 서울 태릉의 한 요양원에 누워있는 아내(75)를 돌보기 때문에 그는 일주일 내내 바쁘다. “‘무너진 사랑탑’을 작곡한 나화랑 선생이 고향 형이었어요. 그분에게서 바이올린을 접한 뒤 음악을 무척 하고 싶었습니다. 열다섯 살 때 어머니께서 수년 동안 모은 돈으로 바이올린을 사주셨습니다. 바이올린을 쥘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고향을 자주 찾는 바람에 마을 주민 300여명 중에는 손씨가 아직도 고향에 그대로 살고 있는 줄 아는 사람도 꽤 있다.
초등학교 교사로 퇴임한 이 마을 이상기(李相基·76)씨는 “명절 때나 겨우 부모 산소를 찾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손씨의 한결같은 정성을 보면 참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손씨는 부모님이 살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일요일 오전 다시 산소를 찾았다. “이번 토요일에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드린 손씨는 “살아계실 때 더 잘해 드렸어야 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천=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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