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되어 만난 老兵들…항해학교 졸업식직전 6·25참전

  • 입력 2004년 6월 4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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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4월 벚꽃이 만발한 경남 진해시 해군항해학교 정문 앞에서 박관모(왼쪽에서 두번째) 이석화씨(오른쪽)가 동료 생도들과 함께 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 -사진제공 이석화씨
1950년 4월 벚꽃이 만발한 경남 진해시 해군항해학교 정문 앞에서 박관모(왼쪽에서 두번째) 이석화씨(오른쪽)가 동료 생도들과 함께 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 -사진제공 이석화씨
“이게 얼마 만이야,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참 많이 늙었어. 그래도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는 걸.”

현충일을 이틀 앞둔 4일 낮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머리가 하얗게 센 70대의 노병 4명이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해군항해학교 동기생인 이들은 6·25전쟁이 터진 1950년 6월 25일 새벽 서로 다른 전쟁터로 뿔뿔이 흩어져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54년 만에 해후한 것.

박관모(72) 손득수(73) 조용철(75) 이석화씨(73)는 고단했던 항해학교 시절과 처참한 전쟁 상황에 대한 얘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손씨는 “항해학교는 하사관이 되기 위한 등용문이었고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얼차려로 유명했던 곳”이라며 “그곳에서 6개월간 동고동락한 전우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해군항해학교 출신의 ‘노병’들인 박관모 손득수 이석화 조용철씨(오른쪽뒤부터 시계반대방향)가 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전사한 동기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다. 이훈구기자 ufo@donga.com

이들은 조씨가 이날 가져온 항해학교 졸업앨범으로 눈길을 돌렸다. 겉은 누렇게 변했지만 앨범 사이사이에 기름종이를 끼워 보관한 덕분에 흑백사진은 또렷했다. 이씨의 사진 옆에 적힌 ‘죽사령’이란 단어가 화제가 됐다. 조씨가 “다른 사람들이 끓여준 죽만 먹고 꼼짝도 안 해 ‘죽 먹는 사령관’이었지”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씨는 “내가 위가 안 좋아 죽밖에 먹지 못했어. 당시 나 때문에 힘든 생활인데도 매일 죽을 끓여줬던 동기들이 참 많아. 결국 이렇게 말랐고 전역 후 위 절제수술까지 했지만 나는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때 죽을 끓여 줬던 친구들은….”

이들의 발길은 전사한 동기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전사자명비로 향했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하나씩 눈여겨보던 이들의 시선이 ‘이봉조’ ‘김명철’ ‘이판동’에서 멈췄다.

이미 알고 있던 이들 3명의 전사자 외에 ‘김창옥’ ‘이상호’라는 2명의 전사자 동기생을 추가로 찾아냈다.

이들의 소망은 두 가지. 우선 동기생 92명의 생사를 모두 확인하는 것이다.

올 3월부터 일본 도쿄(東京)에서 사업을 하는 박광수씨(73)가 주도해 동기생을 수소문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30여명만 생사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생존자는 20명. 또 하나의 소망은 동기생들의 생사 확인이 마무리될 때쯤 해군참모총장이 참석하는 ‘명예수료식’을 갖는 것.

1949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6월 20일까지 6개월간 교육을 끝낸 이들은 당초 6월 20일 수료식을 갖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수료식에서 축사를 하기로 했던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장군의 미국 방문일정 때문에 수료식이 27일로 미뤄졌다. 다행히 1950년 9월 1일부로 하사관 진급은 했지만 예복을 갖춰 입고 참모총장이 노고를 치하하는 수료식을 갖고 싶은 소박한 소망은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박광수씨는 국제전화를 통해 “정부가 생존자 확인작업에 나서고, 6·25전쟁으로 연기된 수료식을 한다면 조국에 바친 청춘에 대한 보상을 조금이나마 받는 기분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원수기자 needjung@donga.com

김상훈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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