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씨 긴급체포 파장]현대비자금 둘러싼 3가지 의혹

  • 입력 2003년 8월 12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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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13총선을 전후해 현대가 조성한 비자금의 정치권 유입 의혹이 드러나면서 비자금의 총 규모가 얼마인지, 최종 수혜자는 누구인지 등을 둘러싼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비자금 규모와 출처▼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 결과 2000년 총선 전후 현대가 조성한 비자금의 출처가 주로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이라는 사실은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비자금의 총 규모에 대해서는 검찰 내부에서조차 100억원설에서부터 600억원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측이 나오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현대가 당초 ‘5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하겠다고 발표했다가 특검 수사에서는 4억5000만달러밖에 송금 증빙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점을 들어 차액 5000만달러(약 600억원)가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추측도 나돌았다.

실제 특검도 한때 이 5000만달러의 행방을 집중 추적했고 그 과정에서 박지원(朴智元)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게 건네진 150억원을 포함해 거액의 비자금을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특검 관계자는 5000만달러가 정치권에 흘러들어갔다는 얘기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는 얘기”라고 부인하고 있다.

아무튼 특검은 150억원 외의 비자금은 특검수사 대상에서 벗어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이를 공개치 않은 채 관련 내용 일체를 검찰에 인계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비자금 전달 과정에 관여한 김영완(金榮浣)씨의 돈세탁 과정이 교묘한 데다 자금흐름이 워낙 복잡해 비자금 전모 파악에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번 수사에서 현대 비자금의 규모와 사용처가 모두 다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문효남(文孝男)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권씨에게 전달된 돈의 규모를 묻는 질문에 대해 “100억원은 넘는다”고 말했다. 박지원씨가 수수한 150억원 외의 ‘+α’ 부분 중 최소 100억원은 그 행방을 찾았다는 얘기다.

▼정치권 수사 어디까지 ▼

검찰이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키로 결정함에 따라 권씨 이외에 현대의 비자금을 받은 다른 정치인들도 줄소환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미 권씨의 비리 혐의뿐 아니라 다른 정치인들도 2000년 총선을 전후해 현대에서 ‘검은 돈’을 받았다는 정황 증거 등을 확보해 수사망을 바짝 좁히고 있다.

검찰은 지난달 22일 권씨에 대해 출국 금지 조치를 내린 상태. 따라서 검찰은 이때 이미 권씨가 2000년 총선 전 현대 비자금 100억원 이상을 받았다는 물증과 관련자 진술을 상당 부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검찰 관계자는 “권씨가 혐의 사실을 부인해도 공소유지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권씨가 2000년 현대에서 돈을 받은 이후 고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운영한 현대 계열사의 유동성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각종 청탁에 개입한 정황을 확보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소환대상자의 폭=권씨에 대한 수사 진전 상황에 따라 소환 대상자의 폭은 달라질 전망이다. 권씨가 불법 자금을 어떻게 모금·배분했는지에 대해 관련자들로부터 어떤 진술을 추가확보할지, 검찰의 입증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가 변수다. 검찰 안팎에서는 권씨 외에 15∼20명의 정치인들이 현대비자금에 연루됐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권씨와 비슷한 역할을 맡아 현대에서 불법 자금을 모금하거나 배분한 정치인들이 소환 대상 1순위로 꼽힌다. 비자금 모금에 직접 관여한 정치인으로는 민주당 내 비주류 실세 2, 3명이 거론되고 있다.

권씨가 개입한 모금 행위와는 별도로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처럼 현대에서 각종 청탁과 함께 불법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도 소환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 범주에 속하는 정치인 중에는 한나라당 의원도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어 이 수사의 파장은 정치권 전반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권씨에게서 거액의 선거 자금을 지원받아 정상적인 회계 처리를 하지 않은 정치인들도소환될 가능성이 크다.

법조계에서는 2000년 권씨로부터 비선(秘線)을 통해 현대비자금을 전달받은 민주당 입후보자들이 수도권과 중부권에만 9∼11명에 달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여기에는 4·13총선에서 당선된 현역의원뿐만 아니라 낙선한 정치인들도 포함됐다는 후문이다.

▽수사전망=그러나 이번 수사가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낙관할 수 없다. 검찰 내부에서는 “이번 수사가 권씨부터 시작해 톱다운(Top Down)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권씨가 끝내 함구할 경우 난관이 예상된다”고 말하고 있다. 수사를 무한정 끌 수도 없는 만큼 바닥까지 모두 파헤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

따라서 검찰이 현대 비자금 모금 및 배분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정치인들을 선별 소환한 뒤 이르면 이달 말경 수사를 끝낼 가능성도 있다. 수사기간 중 정치권의 거센 반발 등도 적지 않은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총선자금 누가 받았나 ▼

박씨가 수수한 150억원은 물론 100억원 이상으로 드러난 ‘+α’ 비자금도 대체로 김영완씨의 돈세탁을 거쳐 권씨에게 전달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권씨는 이 돈을 총선에 출마한 일선 후보들에게 배분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선 당시 한 실무당직자가 권씨로부터 돈을 받아 차에 싣고 다니며 후보에게 나눠주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람도 있다.

2000년 총선 당시 민주당 지도부가 수도권 접전지와 신인들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자금 지원을 했다는 것은 당내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특히 독자적인 자금 동원력이 없는 ‘386’세대 신인들이 당 지도부의 자금지원 혜택을 가장 많이 입었다는 것. 일부 전략지에는 10억원 이상이 투입됐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민주당 소장파 일부 의원들이 2001년 이후 권씨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 동교동계가 “우리가 총선 때 얼마나 많이 지원해줬는데, 이런 식으로 배은망덕할 수 있느냐”며 울분을 토했던 것도 그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동교동계 김태랑(金太郞) 최고위원은 ‘우리는 산을 옮기려 했다’는 저서에서 소장파 J, S, C의원 등을 거명하며 “국회의원 공천과정에서부터 당내 입지에 이르기까지 권씨가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권씨는 이들에게 별도 사무실을 내주고 운영비도 지원해줬다”고 밝히기도 했다.

소장파 외에 권씨와 가깝게 지낸 몇몇 인사들도 억대의 자금을 받았으며 일부 유력 후보의 공천이나 출마포기를 설득하는 데 이 자금이 사용됐다는 설까지 나온다.

한편 “2000년 총선 때 원 없이 돈을 써봤다”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현재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한때 권씨의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했던 청와대 L비서관을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비자금 정계유입 효과 있었나▼

2000년 4월 현대 주요 계열사들은 최악의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은 외환위기 이후 건설경기 침체로 경영여건이 나빠진데다 감춰졌던 부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만기도래하는 채권을 막기가 힘든 처지였다.

1997년 현대그룹에 인수되기 전부터 부실이 심했던 현대투신도 정부의 ‘권유(?)’로 98년 부실기업인 한남투신까지 인수하면서 동반 침몰 위기에 몰렸다. 이런 와중에 고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왕자의 난’이 벌어지면서 현대그룹은 시장의 신뢰를 상실했고 뒤이은 채권단의 무차별적인 자금회수로 금융지원이 절실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정몽헌(鄭夢憲) 당시 현대그룹 회장측이 그룹의 경영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4·13총선을 앞두고 정치자금 수요가 많은 정치권에 접근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권에 대한 비자금 제공은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이 부분은 향후 검찰이 수사를 통해 밝혀야 할 내용이다. 그러나 2000년 5월부터 현대그룹의 자금 흐름이 갑자기 좋아진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현대그룹의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2000년 5월 다른 채권은행들과 함께 현대건설에 2500억원을 긴급 지원했다. 이어 산업은행과 토지공사 등도 번갈아 자금지원에 나서는 등 현대의 유동성 위기 해소를 위한 지원이 잇따랐다.

정부의 ‘힘’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당시 현대에 대한 특혜지원이라는 의혹을 피하기 위해 정부가 일부 부실기업을 ‘끼워 넣기’로 자금을 지원하면서 엉뚱하게(?) 현대 덕을 본 기업들이 있다는 말이 금융계에 파다하게 퍼질 정도였다. 검찰수사 결과가 주목된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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