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심규선/전교조 '창립 그때'를 돌아보라

  • 입력 2003년 4월 13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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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10일 서울시내 초중고교 교사 400여명이 종로2가 YMCA대강당에 모여 ‘교육민주화선언’을 했다. 이 선언에 참여했던 교사들은 이듬해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의 결성과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창립을 주도한다.

그러나 당시 서울시교육위원회(현 서울시교육청) 간부들은 이 모임을 과소평가했다. 한 간부는 “세를 과시하기 위해 동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교사들은 몇 명 안 된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교사 몇 명이 다음날 기자를 찾아왔다. 이름과 소속 학교, 주소를 적은 362명의 교사 명단을 내놓으며 “어떤 징계도 감수하겠으니 신문에 실어 달라”고 했다. 이들은 “서울시교위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분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다음날 “내부적으로 합의를 보지 못했다”며 명단을 다시 가져가긴 했지만 교사들의 순진함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

전교조가 출범한 뒤에는 일선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골탕을 먹었다. 경찰은 웬만한 노조들의 집회 일정은 행사 며칠 전이면 대부분 파악했다. 그러나 유독 전교조의 집회 일정은 밖으로 새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당시 기자는 우리나라의 숱한 노조 중에서 모든 조합원이 ‘대졸 이상’으로만 구성된 노조는 전교조가 유일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조합원의 결집력은 전교조의 큰 힘이다.

93년 10월 전교조는 기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정을 내린다. 해직교사 1500여명의 복직방법을 놓고 교육부는 전교조를 탈퇴해야 복직시켜 주겠다는 최후통첩을 했고, 전교조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맞서고 있었다. ‘명분’을 생명으로 4년간이나 해직됐던 교사들은 전교조 탈퇴를 전제로 한 복직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해직교사들은 “교단으로 돌아가서 참교육을 실천하겠다”며 교육부의 요구를 전격 수용했다. 이 결정은 지금도 전교조의 유연성을 보여준 ‘결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각에 따라 다르긴 하겠으나 전교조가 출범 10년 만에 합법화되는 데는 앞서 열거한 세 가지 덕목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교조가 출범했을 때 벌어진 논쟁과 우려는 크게 세 가지였다. 교사들이 과연 ‘노동자’인가, 편향된 교육을 하지는 않을까, 교육현장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 중 교사의 신분문제나 의식화교육 우려는 이미 논쟁거리가 안 된다. 그만큼 세상이 변했다. 그러나 최근 보성초등학교 서승목(徐承穆) 교장 자살사건은 세 번째 우려만큼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전교조는 99년 교원노조법안이 통과되자 기자회견을 갖고 이렇게 밝혔다. “넷째, 우리는 비합법시대의 어려웠던 조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표출되었던 상대적 과격성, 급진성 등을 말끔하게 걷어내고…다소 무례했던 행동이나 과격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깊이 반성하면서 새로운 합법시대를 살아가는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전교조가 99년의 다짐을 기억하고 있다면 “전교조가 이 일(서 교장 자살사건)과 관련해서 완전 무죄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교장단이나 언론에 책임을 돌리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전교조는 이번 사건이 교사들이 마구 잘려 나가고, 교육기관들이 상대도 해주지 않던 불법단체 시절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요즘 전교조는 힘이 있다. 전교조를 의식하지 않는 교육관계자가 어디 있을까. 그 점만 인정한다면 전교조가 이번 사건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는 자명하다.

심규선 정치부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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