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화천의 산타' 권경철-성봉씨 父子

  • 입력 2003년 3월 2일 19시 30분


코멘트
‘화천의 산타클로스’라 불린 권경철옹(오른쪽)과 같은 자리에 치과를 열고 인술을 펼치는 아들 성봉씨. -권주훈기자
‘화천의 산타클로스’라 불린 권경철옹(오른쪽)과 같은 자리에 치과를 열고 인술을 펼치는 아들 성봉씨. -권주훈기자
40년간 강원 화천에서 ‘권의원’을 개업해온 권경철(權景澈·75)옹은 ‘화천의 산타클로스’로 불린다. 매년 성탄절이 다가오면 직접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하모니카를 불면서 시장통을 누비며 쌀과 돈을 모아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사주곤 해서 얻어진 별명이다.

그가 화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25전쟁 직후인 1956년 국군 제2이동외과 수술부장으로 이곳에서 대민봉사활동을 벌이면서였다. 58년 전역명령을 받고 서울대 병원으로 복귀하려는 순간 주민들이 남아서 진료를 계속해달라고 통사정하는 바람에 1년만 더 있겠다고 결심한 게 96년 본인이 위암으로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40년간 계속됐다.

‘화천의 산타’는 권옹 한 명으로 끝나지 않았다. 치과의사인 권옹의 장남 성봉(聖鳳·50)씨도 아버지가 병환으로 96년 병원을 비운 이후 같은 자리에 ‘권치과’를 열고 대를 이어 인술을 펼치고 있기 때문.

성봉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기억 한 토막.

“아버지는 항상 새벽까지 방송이 끝난 TV를 틀어놓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계셨죠. 편하게 주무시라고 하면 ‘이렇게 해야 급한 환자가 왔을 때 빨리 정신을 차린다’며 TV를 끄지 못하게 하셨어요.”

성봉씨는 “아버지가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다녀오시다가 사고로 피투성이가 됐으면서도 병원에 돌아와 다른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을 보고 의사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또 한편으론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제때 밥 먹고 제때 퇴근하는 그런 일을 하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다.

그래서 택한 것이 위급환자가 드문 치과. 그는 미국에서 임플란트를 연수하고 현지 연구소 연구원과 대표의사로 활동한 뒤 귀국해 서울 강남에 개업하고 있었다.

‘잘나가던’ 성봉씨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천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원치 않던 가정의 불행 때문이었다. 95년 성봉씨의 동생이 사업에 실패해 부도를 냈고 아버지가 이듬해 위암 판정을 받았던 것.

그는 동생의 빚을 책임질 이유가 없었지만 “단돈 1원도 남기지 말고 다 갚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서울 병원을 처분하고 화천에 개업했다.

그는 “처음엔 봉사니 뭐니 할 생각이 없었어요. 돈이 궁했으니까요. 하지만 주민들과 자주 접하다 보니 지방에 있다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못 받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낌없이 도와드리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성봉씨가 최근 무엇보다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 권옹이 오랜 투병생활을 끝내고 다시 무의촌 봉사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전창 기자 je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