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구성한 대구지하철 화재 발생 순간

  • 입력 2003년 2월 18일 16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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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내 우체국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는 전융남(全隆男·62·대구 남구 대명2동)씨는 평소처럼 18일 오전 9시 50분경 집근처 대구교육대 전철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기관사가 있는 맨 앞의 1호 객차였다.

다음역인 명덕로타리역에 도착하자 푸른색 체육복을 입은 허름한 차림의 50대 남자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두툼한 천가방이 들려있었다. 그는 전씨의 맞은 편에 앉았다.

지하철이 반월당역을 거쳐 대구에서 가장 번화가인 중앙로역을 향해 달리자 방화용의자 김모씨(56·대구 서구 내당동)는 전철 의자 옆에 놓아둔 가방속에서 플라스틱 우유통을 꺼냈다.

"우유를 마시려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왼쪽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는 거예요. 몇 번이나 라이터를 켰지만 불이 붙지 않았어요. '여보 왜 지하철에서 자꾸 라이터를 켜느냐'고 나무랐어요."

지하철이 중앙로역에 도착하기 직전 김씨가 들고있던 라이터에서 불꽃이 솟았다. 객차문이 열리자 놀란 승객 40여명이 급히 출구로 뜀박질했다. 전씨가 '큰일 났구나' 생각하며 김씨에게 달려들었다. 승객 3,4명도 방화를 직감하고 용의자 김씨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펑'하는 소리와 함께 객차안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우유통에 담긴 기름이 이미 객실바닥에 엎질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펑 펑'

객차 의자 밑 라디에이터에 불길이 옮겨붙으면서 폭발음이 잇따랐다. 시커먼 유독가스가 객차 밖으로 뿜어져 나왔고 지하철역 천정을 뒤덮기 시작했다.

방화용의자 김씨의 체육복에도 불이 붙었다. 전씨는 40대 승객 한 명과 함께 김씨의 옷에 붙은 불을 꺼줬다.

"연기가 목으로 차올라 지하철역 주변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었어요.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용의자의 옷에 붙은 불을 대충 끈뒤 허겁지겁 바깥으로 빠져나왔어요."

방화용의자 김씨도 아비규환의 상황을 틈타 출구로 달아났다.

평온하던 중앙로역이 순식간에 땅밑 암흑천지로 바뀌면서 옆 객차로 연기가 번지자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승객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경찰과 가족에게 사고 소식을 알리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이미 출구는 검은 매연에 가려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연기와 불기둥이 지하철역으로 확산되었지만 승객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움직임이 둔한 노약자와 여성들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상당수가 질식해 화를 당했다. 승객들은 "워낙 갑작스런 상황이어서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화재로 발생한 연기가 마치 굴뚝을 타고 올라가듯 출입구쪽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혼란은 더했다.

용의자 김씨는 지하철역 출구쪽에 쓰러져 있다 발견돼 대구 북구 노원동 조광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김씨는 방화 2시간만에 같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목격자들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동아일보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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